한줄 詩

뱀의 둘레 - 백상웅

마루안 2018. 5. 31. 19:29

 

 

뱀의 둘레 - 백상웅


제 꼬리를 삼키고 있는 뱀을 그린 그림을 본다.
목구멍 속으로 천천히 암전되어가는 몸통을 지켜보는 뱀의 눈알을 본다.
항문으로 항문이 나올 수 있을까.
바람은 내장 어디쯤에서 폭발할까.

내 미간의 주름이 아버지를 닮아갈 때마다 당혹스럽다.
그처럼 삽을 들고 터널을 뚫으며 열차의 꼬리만 갉아먹으며 살 것 같다. 
살이 살을 파고든다는 것은 내가 나를 씹어 삼킨다는 것.
아버지가 나를, 내가 아버지를 꽁꽁 묶어 암전된 몸통 속으로 끌고 간다는 것.
터널 속을 통과하는 바람이 살갗에 달라붙을 때마다 나는 몸통 속에서 기적을 울리며 굴러가는 바퀴를 생각한다.

누가 자꾸 올가미를 던지는 것일까.
알면서도 나는, 어금니에 소용돌이를 꽉 물고 아버지를 닮아간다.
길은 위장 속으로 길을 끊임없이 밀어넣는다. 나는 길 잃은 내 엉덩이를 길 저쪽에서 마주치고는 뒤쫓아 간다.
둘레를 가진 것들의 뼈는 자라나 살과 살길을 파야 하고.

나는 이미 꼬리를 잘근잘근 삼킨 사람.
막다른 골목이 필요하다.


*시집, 거인을 보았다, 창비

 

 




호주 - 백상웅


그날 우리는 여섯과 서른하나였는데 요즘은 서른둘과 쉰일곱.

첫 이사를 하던 봄날도 말이 없었는데 우린 지금도 말이 없다.

시간 가도 나이가 좁혀지지 않는 아버지와 내가 그렇다는 거다.

그날 경운기 타고 꽃잎 터지는 속도를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가족을 태우고 모든 세간 싣고도 자리가 넉넉히 남았던 경운기.

나는 지금 가진 게 없다. 아버지도 그때도 늙었고 지금도 늙었다.

그간 꽃은 몇만번 폭발했나. 우린 몇 킬로그램이나 말을 섞었나.

우리의 등본은 자꾸 뒷장으로 뒷장으로 도시를 넘고 동을 넘는다.

언제부턴가 따로 방을 구한다. 이제 근력 다할 때까지 이래도 싶은데.

주름 그어지는 모든 생들은 왜 자꾸 경운기 모터처럼 시동을 거는가.

어쩌다 보니 그날의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또 벚꽃이 날린다.


 

 

# 백상웅 시인은 1980년 전남 여수 출생으로 우석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했다. <거인을 보았다>는 그의 유일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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