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도에서 온 편지 - 이응준

마루안 2018. 5. 27. 19:35



적도에서 온 편지 - 이응준



토끼가 늪에서 붉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악어가 숲에서 파란 눈을 깜빡거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바다 위에 서서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던 것만 같은 과거를 바라다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도 증가할 테니
홀로 거리를 걷다가도
그들과 함께 즐거웠던 장소가 서글퍼 피하거나
문득 뼈아픈 생각에 젖는 일이 잦아 괴로울 테고
하도 상처받다가 결국 상처마저 부정할 것이니


세상 모든 노인들은 그래서
아직도 살아 있기 위해 세상보다 훨씬 어둡다.


파괴와 졸음으로 각성한 악어야.
좌절한 원칙주의자처럼 생겨 먹은 토끼야.


인생이 무언가에 대한 강력한 항의처럼 여겨지던
그 시절에
나의 착종이었던 너희에게는
이 그리움이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직 여기가 바로 그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후회의 안식처다.


재가 되어 가라앉는다.



*시집, 애인, 민음사








그 - 이응준



그가 슬픔을 숨기면
나는 그에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묻곤 했다.


그가 자신의 슬픔을 내게 들켰다고 여겼을 때
그러는 그를 내가 알아 버렸을 때
나는 그에게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묻곤 했다.


그가 혼자 걷던 거리
꽃다발을 든 죄 지은 두 손처럼
어쩔 수 없어서 떨리는 모든 것들이
아무 말도 못할 때


과자 굽는 노파의 등이 보이는 저녁의 식탁에서
너무 오래 헤어져 있어 이젠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겠다고 너에게 편지를 쓸 때


빈 수레처럼 요란한 청춘이 이제 다 지나간 것인가.
그 어둠의 소굴 같던 청춘에 나는 나 같지가 않았다.


혼자만 지니고 있는 각별한 소식처럼
오래전부터 그는 아무런 대답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