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디에서 왔나, 이 향기 - 박두규

마루안 2018. 5. 27. 19:23



어디에서 왔나, 이 향기 - 박두규



숲에 왔으나 숲은 없고
어린 편백들이 옹알옹알 자라고 있었다
그 숲에서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 길을 잃는다
잃어버린 길 위에도 바람은 불고
부는 바람에는 꽃들의 향내가 가득하다
어디에서 왔나, 이 향기
궁륭의 하늘 그 끝에서 오신 것인가
비로소 어머니가 입혀주신 배냇저고리를 벗고 싶었다
그대는 이렇게 늘 일상으로 건너오건만
나도 그렇게 그대의 일상으로 건너가고 있는지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놓치지는 않는지
내가 놓친 물고기 한 마리는
푸른 하늘을 헤엄쳐 그대에게 이를 수 있는지



*시집, 숲에 들다, 애지








관계 - 박두규



나는 불행하게도 이 순간 도심의 거리를 걷고 있다
한 떼의 구름이 도심을 빠져나가는 이 시간에도
남태평양 깊은 해류를 타고 고래들은 이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리산 작은세개골 두릅나무엔 새순이 올라오고
갈기를 세운 말들이 몽골의 초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거리를 걸으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단정 짓는 나의 오만을
그 오만으로 가득 찬 내 어둠 속 내장들을
태평양의 고래나 두릅나무 어린 새순들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종일토록 초원을 달려도 그 끝에 이르지 못하고
거친 숨만 토해야 하는 말 한마리의 그 깊은 절망을
나는 알고 있단 말인가
알고 있다 말의 절망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의 오만과 그대의 절망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다
길가의 코스모스도, 꽃을 흔들고 가는 바람도
지하 수백 미터 암반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도 모두
너와 나의 관계와 관계를 가지고 처음부터 동침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불행도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남태평양의 해류를 타고 이동 중인 고래의 불행이다
지리산 두릅나무의 불행이다





# 십 년 전의 시집을 들추다 깜짝 놀란다. 무심히 지나쳤던 시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절창으로 묶인 시집을 뒤늦게 발견하고 반복해서 읽는다. 세상 모든 것이 나와 관계가 있어 고래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라는 말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좋은 시는 언젠가는 발견되기 마련인가. 이 또한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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