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가능한 것들 - 이병률

마루안 2018. 5. 26. 22:27



불가능한 것들 - 이병률
 


모든 열쇠의 방향은 오른쪽
열리지 않으면 반대쪽

 
우리가 인생을 조금 더 받아먹어야 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믿자
우리는 인생이 하나가 아니라고 믿는다

 
마음의 마음이여
내가 나로 망하는 것
모두로 인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 하나로 침몰하는 것
그리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도 아닌 중간인 것
왔던 길 말고 돌아서 왔던 길에다 삽을 부러뜨려 놓는 것

 
그리하여 불가능한 것들을 읽고 쓴다
두 개의 다른 열쇠로 하나의 문이 열릴 것이지만
그 문 하나로
무엇을 무엇에게 넘겨줄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열쇠는 주사위 위에 올려져 있다
모든 예약은 불가능하다
맞추어야 할 뼈가 맞지 않는 것
그것에 대해 한번 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마음의 마음이여
모든 세계는 열리는 쪽
그러나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

 
모든 세계는 당신을 생각하는 쪽
모든 열쇠의 쓰임은 당신 허망한 손에 쥐여지는 쪽



*시집,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








비정한 산책 - 이병률



남산을 지날 때면 점(占)이 보고 싶어진다
왜 흘린 세월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알고 싶어진다
꼬리가 있었는지 뿌리를 가졌는지


남산에서는 오래전을 탈탈 털어 뒤집어쓰고 끊어진 혈을 여미고 싶다
이빨이 몇이었는지 불에 잘 탔는지
모가지는 하나였는지 화석은 될 만했는지
속절없는 기미들을 가져다 멋대로 차려놓고 싶다


간절히 점을 보고 싶다
삭제된 것들의 입장들
우물쭈물하는 옛날들
세수 안 한 것들의 밤낮들
끝이 언제인지 모르면서
나에게 잘 해주지 못한 안색들
결국은 이것들로 목숨 한 칸의 물기를 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조심하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며
곧 해결될 거라는 말도 아닌
어서 끝내라는 말만 듣고 싶다


풍부한 공기에 대담히 말을 풀어놓고 싶다
이 숲 나무에서는 소금 맛이 나는지
그 맛에 사람 맛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싶다


나에게 이토록 박힌 것이
파편인지 비수인지
심장에서 내몬 사람이 하나뿐인지


사람을 갖겠다 해놓고는 못 가졌으면서
훗날 다른 생에서도 사람을 갖고 싶은지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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