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 입하 - 이문재

마루안 2018. 5. 24. 18:27

 

 

봄날 입하 - 이문재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여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신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달밤 - 이문재


은어떼 올라온다는데
열나흘 달빛이 물길 열어준다는데
누가 제 키보다 큰 투망을 메고
불어나는 강가에 서 있는데
물그림자 만들어놓고 나무들 잠들어
북상하던 꽃소식도 강가에 누웠는데
매화 꽃잎 몇 장 잊었다는 듯
늦었다는 듯 수면으로 뛰어드는데
누군가 떠나서 혼자 남은 사람

여울 여울물 속은 들여다보지 않고
달빛 속에서 달빛 속으로
휘익 그물을 던지는 것인데
공중에서 끝까지 펴진 그물이
여름 꽃처럼 만개한 그물이
순간 수면을 움켜쥐는 것인데
움켜쥐자마자 가라앉는 것인데
시린 세모시 치마 한 폭
물속에 잠기는 것 같았는데
달빛도 뒤엉켜 뛰어드는 것 같았는데

은어떼 다 올라간 봄날
누군가 돌아오지 않아
내내 혼자였던 사람
투망에 걸려 둥실 떠올랐다는데.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장 - 김인자  (0) 2018.05.24
친구 하나를 버린다 - 윤제림   (0) 2018.05.24
늦은 꽃 - 김종태  (0) 2018.05.23
오지 않을 것들 - 김왕노  (0) 2018.05.23
하얀 민들레 - 김선  (0) 2018.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