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얀 민들레 - 김선

마루안 2018. 5. 23. 19:32



하얀 민들레 - 김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아찔한 절벽 끝에서
온몸 비워 한 톨의 씨앗으로 날아간 후에야
한 생애 중량이 그토록 무거웠음을 깨닫네
악취 나는 거름 더미 속에서도
독재의 수레바퀴에 짓밟혀도
꿋꿋하게 일어나 꿀을 모으던 한 송이 꽃
산들바람 부는 5월, 어디에 칼날 있어
억센 목숨 저리 쉽게 떨어지는지


바보처럼
이 세상 가장 높은 중심에 피었어도
가장 낮은 자세로 한껏 키를 낮추고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들의 쓰린 가슴
어루만져주더니, 이제는
아무도 꺾지 않을 향기 없는 얼굴로
부엉이바위 아래 잠든 봉하마을
하얗게 비추고 있네


날마다 대궁도 없이 피어오르며 환하게 웃는
저 둥근 달
떠나간 빈자리 메워줄 씨앗 하나로
벼랑 끝 아스라이 매달린
살아남은 꽃잎들



*김선 시집, 눈뜨는 달력, 푸른사상








산길 - 김선



봄날개 퍼덕이며 날던 산까치
둥지 찾는 어스름
산 그림자는 어느덧 긴 돛대를 드리우며 강을 건너고
노을빛 출렁이는 강물을 따라
낯선 마을의 저녁연기도 숨을 죽이는데
그 연기 사이 펄럭이며 흘러가는 저것
아, 잊었던 흰빛
가신 아버지의 때 묻은 옷자락
땀 냄새 밴 옷섶의 세월이 이제야 풀려가는 것인가
저문 산길엔 아무도 없고
산비둘기 울음만 글썽이며 흩어진다
사람은 늘 그림자로 왔다가 그림자로 가겠지만
한 줌 그리움은
저 환한 꽃빛으로 다시 살아오는지





# 읽을수록 애잔함이 느껴지는 시다.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도 옆장이나 뒷장에 한두 줄의 시가 더 있을 것 같은 미련이 남기에 더욱 애잔하다. 좋은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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