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은 꽃 - 김종태

마루안 2018. 5. 23. 20:00



늦은 꽃 - 김종태



남몰래 조금은 늦은 것들이 있다
늦게 온 것들은 고요하고 스산하다
철쭉도 다 간 시절에 자줏빛 등불 밝힌
자목련이 지키는 이슬 내린 화단에 앉아
내 생에 너무 일찍 사라진 인연과
때로 너무 늦게 찾아온 인연을 생각한다
꽃의 소식에 밖을 향한 눈을 감는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순서를 정하듯이
누가 꽃들의 호시절을 정하였을까
따사한 햇살 없이 피고 지는 꽃 있듯이
행불행을 훌쩍 건너갈 수도 없는 사람이다
가만히 가슴 두드린 문을 열어주면
삐죽하게 고개를 들이밀던
늦은 손님을 대하듯 나는 물끄러미 앉아
꽃잎들이 물오르는 소리에 젖는다
천천히 취하려 애쓰는 이들을 생각하며
바삐 지나가는 발자취에 꽃 소식을 부친다
늦은 소식은 다시 소문이 될 터이지만
그늘에서 켜드는 꽃등은 외로이도 훤하다
먼저 간 꽃잎들의 흔적이 역력할 때
늦은 개화에 기댄 저 후생이 궁금하다



*시집, 오각의 방, 작가세계








유곽들 - 김종태



한 사나흘 유령의 혓바닥으로 유리의 살갗을 핧고도 싶다
목적어에 무관심한 타동사처럼 건들대는 전봇대
그곳엔 대개 용의자의 타액이 묻어 있다


육교를 아무렇게나 가로지르는 철새 떼
날아올라 다시 돌아오는 곳, 그곳이 둥지다
헌옷가지 같은 깃털들이 지리멸렬 흩어진 곳이다


횡단보도는 하루 종일 빨간 불인데
시간의 실마리들은 홍등 아래 죽죽 늘어선다
오래 잊혔던 제 이름을 들은 듯
유기견 한 마리가 빈 택시에 꼬리를 흔든다


귀 기울일 때마다 희미해지는 라틴풍의 노래들
오존주의보 지나간 거리가 매음의 낯빛으로 창백하다
어항에서 걸어 나온 녹색이구아나는 아마존 밀림이 그리운 듯
눈 감은 채 긴 등허리를 바람 부는 쪽으로 치켜세운다


유령은 지금 어디 출타중이나 항시 출몰할 수 있다
어느 등 시린 유령은 길모퉁이 선술집 술청에 기대어
한 사발 해장국을 퍼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 김종태 시인은 1971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떠나온 것들의 밤길>, <오각의 방>이 있다. 호서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 하나를 버린다 - 윤제림   (0) 2018.05.24
봄날 입하 - 이문재  (0) 2018.05.24
오지 않을 것들 - 김왕노  (0) 2018.05.23
하얀 민들레 - 김선  (0) 2018.05.23
땅끝에서 부르는 노래 - 임동확  (0) 2018.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