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토토의 달력 - 현택훈

마루안 2018. 5. 22. 22:09



토토의 달력 - 현택훈



2월
당신 생각 며칠이라도 하지 않아서 좋은 달
이틀이나 사흘은 당신이 날 괴롭히질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31일까지 있는 달은
숨이 턱 막힌다 언제나
단추를 끝까지 매던 당신처럼


4월
녹색 단풍잎에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좋은 달
편지가 도착할 즈음 단풍잎이
붉게 물들 수 있기를 기다릴 수 있어서
단정한 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에서 빗방울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11월
토토와 함께 조용한 골목길을 산책하기 좋은 달
은하 미용실을 지나면 걸음이 빨라지는
토토 먼저 가서 끙끙대며 대문 밑을 발로
헤집고 어디선가 리코더 소리 들려올 것 같아
귀 기울이면 어느 새 구름이 저 만치 흘러가 있는


12월
생각의 길을 걸으면 눈이 내려서 좋은 달
눈 쌓인 나뭇가지 뚝 부러지면서
경계 표지를 만들고 차량 통제라도
되면 당신 생각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해서
달그락거리는 주전자 뚜껑 소리가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넣는



*시집, 지구 레코드, 다층








소녀, 혹은 소년기 - 현택훈



소녀도 소년이고 소년이기에 소년인 시절에 대해서 쓰자
토끼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소년들의 오래된 기억은 활과 화살을 만들었다
여우도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무덤가를 지날 때마다 소년들은 겁에 질리곤 했다
지냉이를 잡으려고 바위를 들추면
왜 꼭 지냉이 대신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
컬러학습대백과사전에서 기어나온 뱀들
농약들이 강한 번식력으로 산경을 덮을 때까지
뱀들이 소년들의 눈 속에 군집을 이루었다
연탄가스가 안개처럼 마을을 덮으면
아침에 늦잠을 자는 사람들이 생기곤 했다
몇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사람들
안개 속에는 검은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을 거다
농협 창고에 농약들이 그득 쌓였다가도
이내 빈 농약병들이 죽은 무당개구리마냥 풀숲에 뒤집어져 있었다
뱀들은 농약을 피해 소년들의 귓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소년들은 허물을 벗듯 유년을 벗기 시작했지만
귓속으로 들어간 뱀들이 심장 밑에 똬리를 틀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소녀이거나 소년임을 알게 되었고
파출소가 증설 됐고
교회가 있던 자리에 공장이 생겼고
공장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생겼다
소년도 소녀이고 소녀이기에 소녀인 시절에 대해서 쓰자
아카시아나무 꽃잎이 진 지 오래였지만





# 현택훈 시인은 1974년 제주 출생으로 우성정보대 문예창작과와 목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5년 <지용 신인문학상>,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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