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 한석호

마루안 2018. 5. 21. 19:31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 한석호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마야 여인들은 회로 칠한 강물에 몸을 던지고
사라진 것들의 안부를 찾기 위해
악사의 활은 바지랑대 위에서 목을 다듬는다


한쪽 귀를 자른 사내가
자신이 그린 밀밭의 밤을 강파르게 채색하고 있다
고독한 이름들은 자주 어두워진다
신을 찾는 무리들이 종종 빛을 끊어 버리듯이


답답하고 먹먹한 하늘과 땅
갈 곳이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시제를 만나면
무작정 춤을 추어야 하는 걸까
천문을 열자 푸른 물길이 밤하늘을 연주하고 있다


겉으로만 웃으며 살아가는 사내들
하나같이 제 갈비뼈를 휘어 활을 만든다
살아남은 자의 정오를 지나서 찾아올
그 누군가를 오래오래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문학수첩








자화상 - 한석호
-살바도르 달리풍으로



모든 삶에는 갚아야 할 채무가 있다고 가정할 때
동공의 원주율 밖으로 쏟아지는 잠들은
어디서 발현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권태인가
침묵할 것
수직으로 증명하는 모래시계의 문장처럼,
억새능선에서
늙은 악사는 산을 오르고
눈썹이 하얀 젊은이들은 산을 내려가고 있다
탐욕에 눈먼 밤
골목을 빠져나온 종소리가 물끄러미 십자가를 읽고 있다
때론 가볍고 때론 무거운
열락의 무게들
아이들이 입술을 훔치며
제 속의 질문을 꺼내 만지고 있다
꼼꼼하게 부채를 정리하는
오늘의 이 울음은 내일은 듣지 못할 것이다
꽁꽁 언 호흡을 녹이는 그대가
내 눈 속에서 비릿하게 서 있다
시시각각 풍향계는 다른 감정을 기리키고





# 제목에서부터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다소 낯설고 몽환적인 싯구가 술술 읽힌다.  기초가 단단한 시인임을 단박에 느낄 수 있는 밀도 있는 시다. 소심한 독자이기 때문인가. 이런 시인에게 질투를 느낀다. 다방면에 호기심을 가진 심미안이 시집 곳곳에 박혀 있다. 긴 여운이 남는 시인의 말을 옮긴다.



천 개의 고원을 넘어온 바람이 등을 두드리고 간다
꽃의 고백을 읽는 동안
바로크 첼로의 녹슨 음성이 다녀갔다고 한다
한 생을 기우는 일
수직의 문법을 쌓는 일
동일한 선분에서 읽어야 할 목록들을 펼쳐 본다
언젠가는 지구별이 아닌 어디에서나
부채가 없는 말로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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