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甲이다 - 김장호

마루안 2018. 5. 22. 21:29



나는 甲이다 - 김장호
-전봇대 4



당신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시계
눈 밖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전봇대가 끌고 온 새벽길 나선다


그래, 오늘은 내가 乙이지만
내일은 내가 甲이다


우리 서로 같지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
죽음 앞에 그만 무릎 꿇고
날 구세주처럼 쳐다보는 그 눈길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여태 한 번도 훼손한 적 없는 내 육신
당신에게는 새 빛이거늘
그날이 찾아오면 마침내
나는 甲이다


그날이
빚쟁이처럼 불쑥 찾아오면
주저 없이
아낌없이내주는
나는 甲이다



*김장호 시집, 전봇대, 한국문연








불새의 촛불 - 김장호
-전봇대 52



오늘 다시금 찾아왔어요
언젠가 목울음 삼키며 부둥켜안았던
그 전봇대 따라 노랑 하양 검정 리본이
만장처럼 나풀대는 돌담길


바보라 불리는 당신
뒤통수에 대고 더러 욕도 하였으나
흰 국화꽃 한 송이 바치러
작별의 말이 켜켜이 쌓이는 전봇대 밑에서
반나절 줄지어 차례 기다렸어요


비록 생사일여(生死一如)라 하지만
우리도 언젠가 떠나가야 하지만
아직 돌아갈 때 아닌 햇살도 푸른 오월인데
정말 사람다운 당신인데
이제야 당신을 오래오래 불러보았어요


자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당신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세상을 껴안고
순명殉名의 불꽃 속으로 훌쩍 뛰어내려
불새로 훨훨 솟아올랐어요


생의 끝은 언제나 속수무책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미소 띤 당신 얼굴엔 그늘도 그림자도 없어라
당신의 참뜻을 늦게나마 챙겨보았어요


이제
저기 사람 사는 세상에 촛불 하나 켜겠어요
매번 쓰러져도 결단코 눈감지 않는 촛불
물대포로도 군홧발로도 끄지 못할
불새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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