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묵호를 지날 때 - 정일남

마루안 2018. 5. 21. 19:18



묵호를 지날 때 - 정일남



부두 근처를 지나 어달리 가는 격랑의 해변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언젠가는 슬며시 내 처갓집이 되었다
담배표와 과자와 음류수를 놓고 사는
장모를 거기서 만났다
아침 노을과 당신의 가난한 웃음을
내가 아낀 것도 사실이고
파도소리가 판잣집 벽을 괴롭힌 것도
오래 잊을 수 없다
결혼하고 처음 갔을 때
그녀와 방파제에 올라
나는 한 척의 배도 없으면서
먼 항해를 약속했었다
무언가 불길한 생각
묵호는 왜 어두운 물이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오랜 세월 끝에
어렴풋 해 졌으나
끝내 묵호는 밝은 노래가 되지 못했다
판잣집에 누우면 언제나
파도가 밀려와 등허리를 서늘하게 하였다
자고나면 여자의 연한 살이 햇살에 웃고
저녁이면 황혼이 밝힌 등대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묵호를 떠나 많은 세월을 먹어치웠다
아직도 나는 묵호를 처갓집이라 부른다
묵호의 기억이란
배 한 척 없이 떠돈 나의 삶이고
그녀가 죽은 후에 뉘우친 폐허의
쓸쓸한 포말로 돌아오는 후회의 되풀이
묵호는 내가 들릴 때마다 갈매기 울음을 떠메고
검푸른 바다가 세상을 대변하리라



*시집, 야윈 손이 낙엽을 줍네, 맷돌








弔燈 - 정일남



굽은 척추 세워 외길가던 순례는 끝났는가


밤 안개 스며드는 마을
개는 짖지 않았다


이 밤에 아직 닿지 않은 부음이 있다면
바람의 영혼들아
지체없이 달려가 전하라


지는 꽃잎에 고요가 머물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시대를 평하고 그의 인품을 얘기한다


밤잠 못이루는 꽃등 하나 기다리는 밤


오지 않는 혈육
부음은 끝내 닿지 못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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