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직도 한 뼘이나 남은 꿈 - 김이하

마루안 2018. 5. 21. 18:55

 


아직도 한 뼘이나 남은 꿈 - 김이하


동트기 전에 일어나 서둘러 밥 지어 먹고
아침 햇살에 눈 비비며 나갔다
어스름 저녁에 들어서는 집은 썰렁하다

한 등의 불꽃이 비치면 썰렁하던 집도
이내 환한 궁전이다, 저녁은 곰취 쌈 하나로도 만찬이고
돌나물, 달래 무침 한 그릇으로도 그럴싸한 맛이다

달콤하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길
이렇게 살지 말라고,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떠났던 길
무엇이 되고, 무엇이 되어 쓸쓸한 길 팍팍하게 가다가
다 접고 돌아온 길이

이제는 더 훤히 잘 보이고
눈 감아도 무장 꿈이 그려지는 길이다
그래 한 뼘이나 더 남은 햇살을 붙들고
씨감자를 심었던 저녁이다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서출판 도화

 

 

 

 



집 밖에서 - 김이하


두부 한 모, 담배 한 갑 사려고
길을 나서 수퍼에 가는 일요일 오후 두 시
오래된 집 밖에 두고 간 장롱 두 짝
전주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한 짝은 앞으로 한 짝은 뒤로
서로 앞섶을 파고들 듯
서 있는 오후 두 시의 장롱 두 짝
그 안에 깃든 삶은 모두
어디 갔나, 그게 희망이라면
빌라 뒤편으로 슬쩍 엿보는 햇살 같은
한 줄기 따뜻한 희망이라면

좋겠다, 그러나 오후 두시 집 밖의 장롱엔
그 빈 가슴엔 찬바람 가득한데
어쩌지 못하고 서늘해지는 내 가슴인데
무심코 그 곁에 서 있는 냉장고는
그 속을 알 것인가
자꾸만 뒤를 따라오는 이런 쓸쓸함은
모든 걸 뱉어 버린 삶 같은 것 아닐까

수퍼에 가는 일요일 오후 두 시
두부 한 모, 담배 한 갑을 사고 돌아오면서도
자꾸만 돌아보는 내 사진 한 장
이게 언젯적 추억인지
언제 다시 추억할 기억인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호를 지날 때 - 정일남  (0) 2018.05.21
길갓집에 앉아 - 황학주  (0) 2018.05.21
더 많거나 다른 - 신용목  (0) 2018.05.20
돌잡이 - 윤중목  (0) 2018.05.20
공평한 어둠 - 이해존  (0) 201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