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더 많거나 다른 - 신용목

마루안 2018. 5. 20. 21:35



더 많거나 다른 - 신용목



약속에게 기다림은 전쟁일 테지. 햇살처럼 걸어가다 알 수 없는 거리에서 비를 맞는.....
망각에게 만남은 전생일 거야. 부드럽게 흘러가다, 부서진 악기처럼


내동댕이쳐지는 시간들.


시간들
시간들.


열한시에 열한시를 만나기로 했다.
택시를 탔다.


다섯시에 다섯시를 만났던 것처럼,


물었지. "아름답습니까?" 침묵의 온도와
밤의 음정,
음악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모두들 그래야 한다는 듯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빗물이 유리창을 찢는 것 같아.


박수는 망친 악보 같지.


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집 앞에 가 한잔 더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울까?


열한시를 택시에 태울 수 없어서
우리는 헤어졌다.


서로를 내동댕이친 채 서로를 생각했다. 그것은 아름답지만,


열한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나와 택시 뒤로 멀어지는 열한시와 그때 빵, 순간을 때리는 경적에 대해.


비맞은 햇살과 부서진 노래,


아름다움에 대해.


집 앞 테루테루에는 물고기가 비처럼 토막 난 채 도마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음악이었나? 소주를 마시며 그것이 햇살이라고 생각했으니.
자주 마주치는 사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우아하게 웃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좆같애'라는 말이 들렸고.....


오늘도 택시를 탔다.


열한시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나는 날마다 열한시를 앞에 두고 술을 마신다.
"얼굴이 그대로이십니다."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








이 슬픔엔 규격이 없다 - 신용목



밤, 비에 젖는 발자국을 한장씩 걷어와 차곡차곡 너를 쌓아올려보지만, 바닥에 음각으로 찍힌 발자국은 포갤수록 사라지는 풍경의 마술.
아래층에서는 꼭 무엇을 본 것처럼 아기가 울고 있지만, 웅덩이에 잠겨 있는 발자국처럼 거기 빨갛게 가라앉은 낙엽처럼.
순서를 기다리는 꿈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흩날리는 잠 밖에서,  *이 연은 전부 한줄로,,


한 가지 일은 그리워하는 것. 다른 한 가지는, 잊는다.






# 신용목 시인은 1974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서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수료했다.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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