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집 - 홍성식

마루안 2018. 5. 20. 20:40

 

 

아버지의 집 - 홍성식


겨우겨우 육십 년을 견뎌준
거미줄 같았던 엄마의 혈관이
머릿속에서 끊어지던 그날 이후
곰팡내 나는 시골집 안방에
언제나 어렵기만 한 아버지와
마주 앉는 일이 잦았다

경보음 높인 구급차에
두려운 낯빛의 아내를 실어보낸 뒤
적었던 그의 말수는 더 줄어들고

가난의 먼지 애써 닦아내던
엄마의 툇마루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위태롭다

하지만 어찌 잊을까
네 개의 방마다 그득그득
동생과 자식들로 넘쳐나던 때를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그네들의 늦잠을 채근하던 날들을

검버섯 가득한 그의 손이 다독이는 건
떠나고, 떠나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들

내일이면 다시 도시로 향할
서툴게 차린 막내아들의 밥상
늙은 아버지의 뜨거운 눈물 떨어져도
이미 식은 국 여전히 차갑고
누렁이 한 마리 짖지 않는 아버지의 집

머리 숙인 부자(父子)의 말없는 숟가락질을 헤집고
라디오는 덤덤히 첫눈 소식을 전한다

 

 

*시집, 아버지꽃, 화남

 

 

 

 

 

 

아버지꽃 - 홍성식

 

 

아이는 울며 돌아왔다
다그치는 나에게 학교 안 동백나무가 베어졌다는
의외의 대답
망연자실, 묵묵부답
먼 진원지에서 서러움이 괘종시계처럼
똑딱거렸다
아. 버. 지

눈썹에 이슬 맺히는
자욱했던 물안개길
불 맞아 웅크린 짐승의 눈빛으로
선홍색 동백은 점점이 반짝였다

눈물 덜 마른 얼굴로 잠든
꽃 그림의 셔츠만 찾는
기르는 고양이와도 얘기를 나누는
식물 같은 아이
나의 아이

세상 젤 서러운 꽃이라던
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시샘하듯 목을 꺾는 생명 같은,
어린 목숨 같은 꽃이라던 동백
아버지는 흩어진 생명
목숨의 조각들로 목걸이 만들어
날 무등 태웠었다

아이의 꿈 속에서 나무는 살아날까
평화로운 잠으로 나도 가고 싶건만
다시 아기가 된 아버지의 응석에
모조청자는 푸른 비명으로 깨어지고

아버지
당신 닮은 저 아이는,
저 아이의 아버지인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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