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돌잡이 - 윤중목

마루안 2018. 5. 20. 21:08



돌잡이 - 윤중목



돌잡이로 처음 내가 손에 꽉 움켜잡았던 것이
아버지는 분명 돈이었다 하시고
어머니는 아니라고 실이었다 하시고
외삼촌은 또 아니라고 연필이었다 하시고
도대체 어느 분 말씀이 맞는 건지
이처럼 어른들 주장이 제각각 다른 걸 보면
돌잔치를 아예 안 했던 건지도 모른다란 얘긴데


돌잔치를 진짜로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셋 중 과연 어느 걸 처음으로 잡았든지 간에
잘난 아들 자식 조카 자식이
아버지는 아마 돈 많은 부자가 되기를
어머니는 그저 명 길게 오래 살기를
외삼촌은 또 큰 공부해 이름을 떨치기를
어른들 각자 나름 그리 바라셨더란 얘긴데


하지만 아버지와 외삼촌의 기대는 둘 다 다 꽝인 것이
돈 잘 버는 재테크인지 뭔지는 저기 저 먼 산 바라보듯
박사 따는 학위증인지 뭔지는 저기 또 저 먼 강 바라보듯
재주도 관심도 없이 이제껏 늘쩡늘쩡하고만 살아왔으니
필시 돈이나 연필을 잡은 건 아니었더란 얘긴데


그리하여 끝으로 남은 건 실
실 잡아 무병하고 무탈하게 오래라도 사는 것이
어머니 애틋하신 바람 하나 이뤄드리는 일이련만
몸 중한 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순 객기로 돌아치는데다가
특출나게 타고난 강골이나 강체질도 못되지 싶으니
그렇다면 이게 또 실을 잡은 것도 아닌 거였더란 얘긴데


결국은 돈도 연필도 그리고 또 실도
갓 돌배기 고물거리는 손에 어느 한 개 잡은 게 없었으니
문자 그대로 빌 공 자, 손 수 자, 공수래(空手來)였더란 얘긴데
어느새 나 훌쩍 지천명의 문지방에 올라선 나이거늘
남은 평생 이제라도 무언가 새삼 움켜잡으려 악쓸 것 없이
그저 또 공수거(空手去)로 살다 가면 되겠더란 얘긴데



*윤중목 시집, 밥격, 천년의시작








밥격 - 윤중목



내가 오늘의 점심메뉴로
800원짜리 또 컵라면을 먹든
8,000원짜리 불고기백반을 먹든
80,000원짜리 특회정식을 먹든
밥값에 매겨진 0의 개수로
제발 나의 인간자격을 논하지 마라.
그것은 식탁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입과 혀를 교란시키는 한낱 숫자일 뿐.
식도의 끈적끈적한 벽을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앞대가리 8자들은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소장에서 대장에서 직장으로
울룩불룩 창자의 주름을 빠져나갈 때
나머지 그 잘난 0자들도 모조리 떨어져 나가고.
밥격과 인격은 절대 친인척도
사돈에 팔촌도, 이웃사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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