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공평한 어둠 - 이해존

마루안 2018. 5. 20. 20:50



공평한 어둠 - 이해존



맨 앞줄이 입장을 기다리며 모자를 벗는다. 두 번째 줄이 양복 앞섶을 턴다.


열두 칸 건너 흩어져 있는 사람들. 서른 칸 안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 타일이 깔린 길 위에서 순서를 기다린다.


이 세계는 빛과 어둠이 가른 사각형으로 완성된다.


옆 칸이 같은 칸이 되려 할 때, 불공평하다고 투덜댈 때, 모서리가 조금씩 틀어진다.


한쪽에서 틀어진 좌표를 걷어내며 정확한 좌표로 고쳐 심는다.


매일 기다리기 위해 같은 배열로 선다.


검지손가락이 가장 큰 대리석에 앉아 책상을 두드린다. 오로지 한 사람씩 내보내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규칙적인 배경 속에 덧니처럼 드러나는 차이들.


한꺼번에 간격을 지우며 지붕의 그림자가 미끄러진다. 공평한 어둠이 깔린다.



*시집,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실천문학








고시원 - 이해존



전등이 낡고 닳은 세간살이를 읽는다 막다른 길에 주저앉았다 겨우 몸만 흘러든 이곳에, 어두컴컴한 낭하가 익숙한 시력을 밝혀 나갈 때 하나둘씩 살림살이가 늘었다 집 속에 절박한 집들을 거느린 곳, 저녁 무렵이면 하나둘씩 흘러들어 한 지붕 아래 포개지는 집, 아이들 소리가 새는 방과 밥 익는 냄새가 깨우는 아침을 꿈꾸며 등 시린 잠을 청한다


쉽지 않은 잠을 재우는 건 노역인가 낮게 흐느끼는 이미자가 새어 나오는 옆방은 외아들 병치레로 집도 아내도 다 쓸려 보냈다는 김 노인의 방이다 반 평 공간에 꽉 찬 불빛보다 환한 상처가 발 한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하고 살아온 새우등에 결리는 밤, 유서처럼 잘 정돈된 방을 또 훔쳐낸다 낮 동안의 거친 막노동에 모래알만 따라와 손끝으로 꾹꾹 찍어 훔쳐내고 있다 내일도 손끝에 선명히 찍어내야 할 모래알 끝나지 않은 노역


한 방이 비워지면 감쪽같이 흘러드는 빈 몸들, 나고 들고 그 속에 오늘도 남긴 사람은 말 못할 빗장 굳게 걸어 잠그고 가벼운 작별 인사 건넬 줄 안다 등 시린 새우잠 끌어안고 꾹꾹 모래알 삼켜내며 오롯이 밝히는 밤을 안다





# 이 시집에 실린 대표작을 꼽으라면 이 두 편을 선택하겠다. 나에게 좋은 시란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다. 시인의 말을 옮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겨우 하나의 이해를 보낸다.


나도 당신일 수 있다는 이해.
너무 늦거나 무감각했던.....


행간을 더듬으며 헤맸던 길에
또다시 발을 들여놓아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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