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지는 시간 속에서 - 김시종
거기엔 늘 내가 없다.
있어도 아무런 지장 없을 만큼만
나를 에워싼 주변은 평온하다.
사건은 으레 내가 없는 사이 터지고
나는 진정 나일 수 있는 때를 헛되이 놓치고만 있다.
누군가 속여서가 아니다.
얼핏 한눈 판 순간
바늘은 소리 없이 미끄러진다.
시선을 떨어뜨린 괘종시계가
태연히 알리는 바로 그 시각이다.
그리하여 밤은 가라앉은 늪이다.
웅크리는 게 안식이듯
실러캔스의 선잠이다.
깊이 잠들면 시대도 끝나겠지.
끝나 버린 시대에 가로누워
깨어나고픈 잠이겠지.
남겨진 채
놓쳐 버린 채
흔들리는 눈을 껌벅거리며
빤히 응시하는 건 나다.
젖빛에 어둠을 드리우고
단숨에 시간이 스러진다.
왠지 보이는 건 그뿐.
번데기가 보는 흐릿한 세계가 번진다.
나 자신이 바로 껍질 속.
그 뜨거운 햇살의 난무로 부화한 건
나비였나.
나방이었나.
기억조차 못할 만큼 계절을 삼키고
터져 나온 여름의 내가 없다.
늘 거기엔 내가 없다.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피의 외침이다.
눈꺼풀 안에서 흐려지는 시간은 희다.
36년을 거듭해도
여전히 놓치고 마는 나의 때가 있다.
저 멀리 내가 스쳐 지난 거리에서만
시간은 활활 불꽃을 세워 흘러내린다.
*시집, 경계의 시, 도서출판 소화
아직 있다고 한다면 - 김시종
아직 계속 살아가는 게 있다고 한다면
참고 견딘 시대보다도
한층 무참히 부서진 기억.
그걸 되살리는 동공(瞳孔)인지도 모른다.
이 서리 내린 날에
아직 죽지 않은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연신 빼앗은 복종보다도
한층 원망스런 창백한 인종(忍從).
탄피가 녹슬어 있는 산딸기의
붉은 복수인지도 모른다.
아직 있다고 한다면
그건 피 묻은 돌의 침묵.
아니 돌보다 짙은 의식의 결정(結晶).
양지에서 녹기 시작하는
그 빈모(貧毛)의 점액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매마른다.
사물의 모양을 잃고서 알게 되는
첫사랑의 형상이다.
아직 썩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그리하여 봄은
나의 깊은 잠 밑바닥에서도 뿌옇기만 하다.
그럼에도 아직
가없는 회한이 있다고 한다면
해는 변함없이 총구 끝에서 반짝이고
바다는 요동치고
구름은 흐른다.
그날 솟구쳐 오른 채
새파란 하늘에 박힌
나의
겨자씨.
*번역: 유숙자
*김시종 시집, <광주시편>에 실린 시를 시선집으로 다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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