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스러지는 시간 속에서 - 김시종

마루안 2018. 5. 19. 23:39



스러지는 시간 속에서 - 김시종



거기엔 늘 내가 없다.

있어도 아무런 지장 없을 만큼만

나를 에워싼 주변은 평온하다.

사건은 으레 내가 없는 사이 터지고

나는 진정 나일 수 있는 때를 헛되이 놓치고만 있다.

누군가 속여서가 아니다.

얼핏 한눈 판 순간

바늘은 소리 없이 미끄러진다.

시선을 떨어뜨린 괘종시계가

태연히 알리는 바로 그 시각이다.

그리하여 밤은 가라앉은 늪이다.

웅크리는 게 안식이듯

실러캔스의 선잠이다.

깊이 잠들면 시대도 끝나겠지.

끝나 버린 시대에 가로누워

깨어나고픈 잠이겠지.

남겨진 채

놓쳐 버린 채

흔들리는 눈을 껌벅거리며

빤히 응시하는 건 나다.

젖빛에 어둠을 드리우고

단숨에 시간이 스러진다.

왠지 보이는 건 그뿐.

번데기가 보는 흐릿한 세계가 번진다.

나 자신이 바로 껍질 속.

그 뜨거운 햇살의 난무로 부화한 건

나비였나.

나방이었나.

기억조차 못할 만큼 계절을 삼키고

터져 나온 여름의 내가 없다.

늘 거기엔 내가 없다.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피의 외침이다.

눈꺼풀 안에서 흐려지는 시간은 희다.

36년을 거듭해도

여전히 놓치고 마는 나의 때가 있다.

저 멀리 내가 스쳐 지난 거리에서만

시간은 활활 불꽃을 세워 흘러내린다.



*시집, 경계의 시, 도서출판 소화








아직 있다고 한다면 - 김시종



아직 계속 살아가는 게 있다고 한다면

참고 견딘 시대보다도

한층 무참히 부서진 기억.

그걸 되살리는 동공(瞳孔)인지도 모른다.


이 서리 내린 날에

아직 죽지 않은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연신 빼앗은 복종보다도

한층 원망스런 창백한 인종(忍從).

탄피가 녹슬어 있는 산딸기의

붉은 복수인지도 모른다.


아직 있다고 한다면

그건 피 묻은 돌의 침묵.

아니 돌보다 짙은 의식의 결정(結晶).

양지에서 녹기 시작하는

그 빈모(貧毛)의 점액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매마른다.

사물의 모양을 잃고서 알게 되는

첫사랑의 형상이다.

아직 썩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그리하여 봄은

나의 깊은 잠 밑바닥에서도 뿌옇기만 하다.


그럼에도 아직

가없는 회한이 있다고 한다면

해는 변함없이 총구 끝에서 반짝이고

바다는 요동치고

구름은 흐른다.

그날 솟구쳐 오른 채

새파란 하늘에 박힌

나의

겨자씨.



*번역: 유숙자

*김시종 시집, <광주시편>에 실린 시를 시선집으로 다시 묶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평한 어둠 - 이해존  (0) 2018.05.20
아버지의 집 - 홍성식  (0) 2018.05.20
오래된 골목 - 조성국  (0) 2018.05.19
나는 더 아파야 한다 - 정세훈  (0) 2018.05.19
골목은 기억이다 - 조연희  (0) 2018.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