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골목 - 조성국

마루안 2018. 5. 19. 23:24



오래된 골목 - 조성국



이 골목에 이십 수년 살아도

가보지 않은 샛길들 많다 이리 굽고

저리 굽어서 한치 앞을 분간 못하는

발길을 일러주는 애기보살 점집이 있고

앳된 창녀가 이따금 기대는

어슷하게 기운 녹슨 함석 문짝의

전등갓 깨어진 여인숙 불빛이 있고

늘 게슴츠레한 눈빛을 던지던 과수댁의

외상 점방이 있다 꽉 막힌 골목길이란 없다

막다른 끝에 누군가의 집이 있고

케케묵은 거기에 구뜰하게 세 들어 사는

헐값에도 팔 수없는 싸구려 고물들,

불꺼진 보일러 화통과 켜켜이 쌓인

빛바랜 책장들을 저윽히 바라보면

체증 맺힌 명치께처럼 먹먹하고 벅차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쩔 거냐면서도

저물도록 요란스런 고물장수의 목쉰

확성기 소리가 흔들어놓은 이 순간, 깜박하고

이내 꿈틀거리는 외등처럼

오래된 골목 샛길을 자꾸만

바장거리며 되돌아보는 것이다



*시집, 슬그머니, 실천문학사








순한 눈물 - 조성국



동구에 들어서면 언제나 제일 먼저 쳐다보았다

그믐 달빛의 잔광도 비켜가는 고샅에

참새 눈빛만 한 불빛이 또렷하게 깜박이던 집


천리향 깊은 마당 켠 수수롭던 햇빛에

윤기 나는 이파리의 늙은 먹감나무 감꽃을

튀밥처럼 주워 먹던


알밴 팔뚝 검게 그을리며

십여 두 남짓 한우를 치며 논밭길도

저리 미쁘게 내딛는

그러면서 쌀밥 같은 이팝꽃만 외로운 빈집에 들러

쥐가 전선줄을 안 갉았나,

상수도 꼭지 틀어보며 돌아보고

곧잘 면소의 농민회 나가 밤이 늦을 때면


그 집 여섯 살짜리 아들 녀석이

순한 눈매를 그렁거리며 여물을 주던 우사에서는

또 팔려갈 어미 소의

마지막 젖을 다디달게 빨고 있는

애지고도 긴 송아지 울음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 최소한 40대 이상은 돼야 이해할 수 있는 시다. 무조건 지나간 것들이 그립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건너 뛸 수 없는 배고픈시절이 있었기에 추억이 더 단단하지 싶다. 골목길도 자꾸 사라지고 그런 정서 또한 기를 수 없는 시대다. 변하는 것을 받아들여야겠지만 지워지지 않는 애틋함은 간직하고 싶다. 시인도 그랬을까. 악다구니 속에서도 그때는 순한 눈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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