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골목은 기억이다 - 조연희

마루안 2018. 5. 19. 22:50



골목은 기억이다 - 조연희



신호체계로 묶여 있던 길들이 풀어지면서
골목은 시작된다.
대로에서 꿈틀꿈틀 빠져나온 샛길이
밥 냄새 따라 흘러 다니고
분리수거 되지 않은 추억이
툭툭 발을 걸어오기도 하는 곳
저녁마다 따뜻한 불빛으로 대문이 솟아오른다.
꼬리가 긴 사람들이
구불구불 제 하루를 끌고 올 때도
골목은 오른쪽이나 왼쪽
어두운 모퉁이를 숨기고 있다.


담벼락마다 노상방뇨의 청춘들
너덜너덜한 벽보 위에
시시껍절한 사연들을 덧바르는 게 삶이라고
긴 담이 위로워
집들은 골목을 만드는 거라고


이정표 하나 없는 낡은 골목은
꼬부랑 번지수여서
갈림목에서 자주 기억이 엉키기도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 길을 찾아간다.


골목 끝에 그대
막다른 그리움이 있어서.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노마드북스








마네킹 - 조연희



여기저기 장기불황의 조짐이 보이던 날들
'임대문의'를 내건 후부터
내 눈물은 헐거워진 수도꼭지처럼
꽉 채워지질 않았고 누수돼버린 꿈
쇼윈도 불빛 아래서 수없이 복제된 난
밤마다 시장 사람들을 닮아 점점 수다스러워졌다.
재개발이 될 거라는 풍문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희망도 공시지가로 책정돼 있는지
사람들은 그리마의 모습으로
발빠르게 지나다니기만 할 뿐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진 않았다.


윗도리가 나를 입고 바지가 나를 꿰차고 신발이 나를 신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실연을 당하기 위해 서 있는 나
단골은 바람둥이 애인 같아서 잊을 만하면 나타나
애정이 식은 손으로 휘적거리기만 할 뿐
어쩌다 네  귀퉁이가 닳은 홀쭉한 종이가방 모습으로
기약 없이 사라져 갈 뿐
이 세상에 영원한 단골은 없으니 그때마다 암전되는 내 몸
나는 철 지난 내 가죽들을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복제된 나만큼이나 수많은 가죽들이
외상값으로 줄줄이 밀려 있었다.
앞집 정육점에선 벌건 속살들이
내 가죽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발밑에 내가 버린 입술들이 수북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내 기다림도, 추위도
모두 임대해주고 싶었다.





# 조연희 시인은 나름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시를 쓴다. 쓰지 않고는 못배기는 가슴을 가졌다고 할까. 탄탄한 싯구에서 오랜 시쓰기의 내공이 느껴진다. 앞으로의 작품을 지켜볼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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