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피었으므로, 진다 - 이산하

마루안 2018. 5. 14. 21:40

 

 

 

한라산의 시인 이산하의 사찰기행문이다.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난 이산하 시인의 본명은 이상백,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었지 싶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낸 시집은 딱 두 권뿐이다. 그는 외할머니가 주지로 있는 사찰에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이산하 시인이 전국 사찰을 돌며 쓴 기행문이다. 그의 발길을 따라 독자는 오고 가는 과정에서 사무친 그리움을 느끼기도 하도 내려 와서 제대로 살지 못함을 반성하기도 한다. 비록 많은 시는 쓰지 못했지만 시인 행세를 해도 충분히 설득이 되는 글이다.

 

은해사를 다녀 오며 쓴 대목에 이런 문장이 있다. <돌아오는 길, 비가 조금씩 내렸다. 버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미끄러지기도 하고 사선으로 흐르기도 했다. 빗방울들은 유리창에 부딪치자마자 자신의 형체를 완전히 허물어버렸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빗방울들도 있었다>.

 

은해사는 추사의 글씨가 많기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곳을 가 봤지만 은해사는 못갔다. 이 책으로 그 절에 완전 빠졌다. 시인은 중이 되진 않았지만 절반은 스님이다. 그는 절에서 온전히 시인으로 태어난다. 언급한 사찰 중에 못 가본 각연사를 꼭 가고 싶다.

 

<나에게 가장 좋은 절은 마른 낙엽 같은 노승 하나가 절벽 위 암자의 툇마루에서 다람쥐와 함께 햇볕을 쬐며 이를 잡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런 절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기가 막혔다. <신촌 봉원사는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와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옆구리에 끼고 가고 싶은 절이다>. 헐,,

 

봉원사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여러 번, 아니 안산을 오를 때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절이다. 실제 이산하 시인과 친구였던 기형도가 어느 날 봉원사로 시인을 데리고 가서 이러저런 설명을 해줬다. 이 책을 읽고 봉원사를 갔더니 지나쳤던 공간이 다시 보였다.

 

이 외에도 시인는 눈으로 표현하는 주옥 같은 문장들이 가슴을 적신다. <불일암은 부사와 형용사가 없는 절이다>. <오늘은 언제나 남은 생의 첫날이다. 그 첫날들이 모여 생의 장강을 이룬다. 난 그 강 위에 뜬 가랑잎이다. 가랑잎이 가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 -부석사.

이 책에는 동백꽃이 많이 나온다. 미황사, 불일암, 선운사 등 그가 쓴 한라산의 멍울 제주 4.3의 상징꽃이 동백인 이유가 달리 있을까. 그는 시인이면서 혁명가였다. 그가 쓴 시와 그의 마음을 움직인
시 두 편을 옮긴다. 시인의 정체성이 담긴 시로 모두 이 책에 실린 것들이다.

풍경 - 이산하

절로 가는 길은 성당을 거쳐야 하고
성당으로 가는 길은 절을 거쳐야 한다.
성당 마당에는 목련과 은행나무가 서 있다.
목련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있고
은행나무는 삶을 마감한 열매들이 떨어져 있다.
두 나무가 서로 나란히 피고 진다.

성당을 지나 절로 들어선다.
절에는 넘어야할 할 계단이 많다.
한 계단 오르면 목련꽃이 피고
다음 계단을 오르면 은행열매가 지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풍경이 보인다.
풍경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도 소리를 울리고
꽃보다 잎이 먼저 피어도 소리를 울린다.
이렇듯 흔들리며 우는 것은
바람 탓도 아니요,
세월 탓도 아니다.
무엇이 먼저 피고 지든
세상을 간절히 본 자의 저문 눈빛 같은 풍경소리는
허공을 버림으로써 계단에 이르고
계단을 버림으로써 허공에 이른다.
절로 가는 길은 성당을 거쳐야 하고
성당으로 가는 길은 절을 거쳐야 한다.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고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고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뜨지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을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어느 길로 갈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