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절반이라는 짠한 말 - 오은

마루안 2018. 5. 13. 23:11



절반이라는 짠한 말 - 오은



봄이 점점 힘들게 찾아온다
힘들게 와서
기척 없이 사라진다
보기도 전에 입맛 다시게 하는 요리처럼
입맛 다시다가 싱겁게 끝나버린 식사처럼


빈 접시는 쓸쓸하다
잉여는 잔해를 동반하므로
잔해는 기억을 동반하므로
기억에 있어서는
명보다 암의 유통기한이 더 기므로


칼질하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것은 감각적이었다
접시와 포크가 마찰하던 순간에는
눈꼬리가 올라가 표정이 되었다
칼이 고기 표면에 닿던 순간에는
입꼬리마저 올라가 표정이 풍부해졌다


고전음악이었는지 팝음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식사 분위기와 어울렸으므로
침묵에도 대화에도 적당했으므로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기만 했으므로


칼로 고기를 썰다 핏물이 흘러나왔다
너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잔인해졌다
우리는 인간답게
인간적으로 물들고 있었다


완벽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말을 반으로 줄였다
애써 아끼는 방식이 아니라
끔찍이 아끼는 방식으로
생각을 반으로 줄였다
희망을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습성을 버리는 방식으로


목구멍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있어
수프에 소금을 친다
초를 치는 기분이 아니라
잰걸음을 치는 기분으로
소금을 치며 우리는 감각적으로 싱거워진다
인간적으로 만족해한다


봄은 제 모습을 절반만 드러내고 사라졌다
말할 생각도
생각할 겨를도
아지랑이처럼 아질아질했다


시선을 거두는 자들은
반만큼
절반만큼
딱 절반만큼만 짠해졌다


나머지 말은 가슴 어디께 있었다



*시집,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
 







내일의 요리 - 오은



내일은 언제나 배가 고픕니다
식욕이 베이킹파우더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모레를 위해서라도
사방에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뒷맛이 씁니다


오늘은 밥을 먹습니다
마음이 글루텐처럼 죽죽 늘어납니다
피부에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첫맛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어제는 쌀을 씻었습니다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나의 명사를 위해
너무 많은 동사들을 소모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해가 기울었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밥은 끓기도 전에
식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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