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심문관 - 김성규

마루안 2018. 5. 13. 23:23



심문관 - 김성규



눈 쌓인 나뭇가지를 만지며 심문관은 하늘을 본다

몇 해 전 망명자가 잡고 있던

미루나무 가지에 다시 새 잎이 돋는다


심문관도 정원사도 봄눈이 녹으면

일을 그만둘 것이다

그도 최선을 다해 심문을 했고 정원사도

겨우내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느라

허파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봄눈이 녹기 전에 심문관은

또 몇 명의 망명자를 심문할 것이다

정원에는 얇은 비명처럼 꽃잎이 날릴 것이다


바람이 나뭇잎과 뒤엉키며 흘러가는 소리,

공기의 결을 따라 발자국 위로 쏟아지는 햇살,

바람과 햇볕과 소리의

완벽한 결합을 보며 심문관은 탄복한다


눈송이가 녹아 흐르는 시간만큼 심문관은 의무를 다할 것이며, 이 세상에 심판없는 시간만큼 나무들은 자라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규칙 없는 봄이 끝나면 정원사는 가위를 들고 하늘로 솟구칠 것이다


스스로를 형틀에 매달고 살아가려는 망명자들

그들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햇볕 속에서 신음하던 나뭇가지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오늘 또 한명의 망명자가 체포되었다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








정원사 - 김성규



출항하는 배에 숨어든 망명자가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을 떠올리며

늙은 정원사는 기침을 한다


항구에서 체포되었을 때 순순히 손을 내밀던 망명자

정원으로 돌아와 심문관의 질문에

입술을 떨며 그는 말했다


모든 나뭇가지가 하늘로 향하고 결국 지상으로 쓰러지듯 모든 길은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딱지를 떼기 전피가 흘러나오지 않듯 우리가 맛보지 않은 향기는 상처 안에 갇혀, 상처를 벌리지 않고는 아무도 그 향기를 볼 수 없습니다


수없이 피고 지는 망명자의 표정을 보며

그 표정으로 쏟아지는 굴욕적인 햇살과 햇살을 쓸고 지나는 바람을 보며

심문관은 탄복하고


가가가지를자자르지아않고사사살수없는저정원사와

스스스로베베어지길기기다리는마망명자

가같은모양가지가보보고싶은시심문관

우리는하하한번도저저저전지되지않은으으의심을수숨긴자자자들입지요


주인 없는 정원을 떠난 정원사는 형장에 펼쳐진

거대한 나무들을 손질하며 말을 더듬고

형장으로 통하는 길에 심겨진 미루나무

그 나무를 잡고 망명자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늘


죽음 직전,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 향기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심장 속에 새겨넣는다






# 김성규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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