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밖에서 - 박용하

마루안 2018. 5. 13. 23:33

 

 

문밖에서 - 박용하


사람을 아끼는 일이 일 중의 일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여러 세월이 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하게 사는 것이 힘들었다

세상을 버리는 야심이
세상을 지배하는 야심보다 더 지고한 야심일 수도 있었다

남이 보라고 들으라고 울 수는 없었다
그것이 한계였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다
성자는 따로 있었지만 외따로 있지는 않았다

남의 자식을 지 새끼처럼 키우는 성자가
대문 바로 앞에 산다는 것을 안 것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나쁜 일은 생색내기 딱 좋았다
좋은 일은 얼굴을 들고 다닐 정도로 한가롭지도 않았다

사람을 아끼는 일이 일 중의 일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눈먼 사랑과 눈뜬 죽음이 가버린 후였다

세상에 내 몸 아닌 것이 없겠지만
내 몸보다 귀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 처한 천하 대사일 거라고 생각하니
하루가 천애 고아를 닮아 그저 슬프고 참담했다

 

*시집, 한 남자, 시로여는세상

 

 

 

 

 

 

등대 - 박용하

 

 

이틀이 멀다 하고 피가 끓었다

니가 져라,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실제 나는 자주 지고 살았다

이기고 지는 일로 목매다는 승자 독식 사회에서

내가 이길 코딱지만 한 세상도 없었지만

나는 지는 일에 자주 목말라했고 목 매달렸다

대체 지고 살라는 저 말의 뿌리가

어디서 왔을까 곰곰 생각할 적에도

천지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부처님 손바닥에도 적이 창궐했다

누워도 누워도 분노는 눕지 않았고

싸워도 싸워도 싸움은 뻗지 않았다

외세와 싸우고 나면 더 악랄한 내전이 기다렸다

그것은 이상한 사업이었다

내가 원수를 제압할 수 없었듯이

내가 나를 제압할 수 없었고

나를 구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내가 나를 구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천지사방이 빚 잔치였고 죽을 곳이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이 휘어진 기억 - 김남호  (0) 2018.05.14
거울 앞에서 - 박승민  (0) 2018.05.14
심문관 - 김성규  (0) 2018.05.13
절반이라는 짠한 말 - 오은  (0) 2018.05.13
바람을 구기다 - 주영헌  (0) 2018.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