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을 구기다 - 주영헌

마루안 2018. 5. 13. 23:00



바람을 구기다 - 주영헌



먼 곳의 지명이 갑자기 떠오를 때
그때 그곳의 바람 한 장이 펄럭였을 것이고,
그때 바람의 이름을 진저리라고 불러도 되나
봄날의 아카시가 향기의 힘을 모두 빼고 있는 중이다
하얗게 피어서 하얗게 말라가는 생
얼굴이 모두 지워진 것들이 분분(紛紛)할 것이고
멀리서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은 난난(亂亂)할 것이다


기억나는 것들이 날린다 해도
내 기억에는 이미 윤곽이 없다
바람의 미세한 간극(間隙)사이에는 주름만 가득해서
구겨진 기억은 거칠하기만 하다
바람, 하고 부를 때
흩어진 떨림들 사이마다 푸른 피가 흐를 것이고
쓸쓸함은 빽빽이 우거지겠지


바람, 하고 부르자
갓 열린 풋것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바래져 오랜 것들에게는 펄럭이는 낱장이 있다
낱장 한 장을 덮고도 나른해지는 오후


저 쪽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은 구겨지며 소란하다
나이가 없는 바람은 오늘도
아이처럼 바쁘다



*시집, 아이의 손톱을 깎아줄 때가 되었다, 문학의전당








첫, - 주영헌



흐르는 것의 속성은 흐르고 흘러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온다는 것


첫아이를 잃었을 때 십 년만 견디자 생각했다
앞서 떠나보낸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가슴에서 지우는 일은 딱 십 년이면 충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당신은,
사랑이 그리 쉽게 떠나갔는가?


지금껏 살아온 생(生)을 되돌아볼 때
기억의 아픔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음각(陰刻)되는 것이었다


추억은 옅어지고
고통은 가슴속에 낙인으로 남는다
웃음 질 만한 앞 뒤의 이야기는 모두 사라지고
통증만 남아
가슴을 찌른다


봄에 태어나 가을로 떠난
첫사랑


슬픔은 흐르고 흘러 몸으로 다시 파고든다





*시인의 말


이미 진 것을 기억하고
앞으로 질 것을 추억하기 위하여
사람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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