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의 일생 - 박남원

마루안 2018. 5. 12. 19:08

 

 

그의 일생 - 박남원

 

 

그의 전 재산이라고는 그의 두 귀와 머리카락과

단세포로 된 두 팔과 다리 그리고 상 하반신에 걸친

싸구려 한 벌의 옷뿐이었다.

그는 징집연령이 되어 19xx년 봄 어느 날 휴전선 근처

어딘가에 최종 배치되어 근무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비가 1~3미터를 구별 못하게 할 만큼

쏟아지는 우중의 철책선 근방에서

6.25때 매설된 지뢰를 잘못 밟아

그의 마지막 재산마저 깡그리 탕진해버렸다.

내가 그 이듬해인 19x1년 어느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가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에 가보았는데

그가 묻힌 자리에는 흔한 꽃 한송이 벌 한마리도

모여들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단조롭게 조각된 화강암 묘비와

아무 형용사도 덧붙이지 않은 묘비명과 입영하던 날

열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친구인 나에게 악을 쓰고 부르던

그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 노래가사가

내 기억 속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집, 막차를 기다리며, 한길사

 

 

 

 

 

 

행진곡 - 박남원

 

 

가자

장의사 옆집 지하다방으로

죽은 이들을 만나러 가자

푸른 하늘은 꺼지고 회색빛 하늘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

거리엔 어느덧 기만의 불빛

불빛들이 비추는 우리들 사소한

무우씨레기 같은 걱정 잠시 거두고

지울 수 없을지라도 근심 잠시 접어두고

거리에서 골목에서 술 한잔 속에서도

흐늘 흐늘 걸어나와 떼지어 가자

 

가서

그들이 못 다한 얘기

우리들이 못 다 들은 얘기를 듣자

왜 죽었는지

왜 시퍼런 목숨 내던져 죽었는지

불길에 훨훨 불타 죽었는지

왜 생생한 가슴팍 깡그리 깨뜨리고

그 속에 틀어박혀 영 나오지 못하는 것인지

 

가서

그동안 정이 든 검은 차를 마시며

숨 죽이며 수근수근 들여오는 소리

그리고 이승의 산맥들이 허물어지는 소리

피레네산맥이 무너지고

안데스산맥이 무너지고

필리핀 군도가 산산히 부서지는 소리

무엇보다 태백산맥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세상의 모든 산맥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그 위로 무럭무럭 스며오는 새 김의

생명소리를 들으면서

가자 장의사 옆집 지하다방으로

죽은 이들을 만나러 가자

 

 

 

 

# 박남원 시인은 1960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숭실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막차를 기다리며>, <그래도 못다 한 내 사랑의 말은>, <사랑의 강>, <캄캄한 지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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