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패배하는 습관 - 최금진

마루안 2018. 5. 12. 18:21



패배하는 습관 - 최금진



간다, 패배하러 간다, 결론부터 말하는 버릇은 나의 용기
무덤에서 나와 손을 흔들고 있는 아버지를 뒤로 두고
쫒기듯, 깨지기 위해, 망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세상으로 돌아간다
버스가 집이었던 적도 있었다, 길들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못된 것만 가르쳐주었다
생로병사가 빌어먹을 복지정책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면
타고난 팔자에 달려 있나니


안 올 거지
왜 와야 하나요


우리는 지는 사람, 싸우기도 전에, 적을 알기도 전에
슬며시 무릎을 꿇고 패배를 위해 무얼 변명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도가니탕을 좋아하는 아버지, 도기니가 닳도록 꿇어앉은 아버지
족발을 좋아하는 나, 발이 손이 되도록 비는 나
웃으면서 사과를 받아내는 사람들
웃으면서, 농담하면서 때리는 사람들
감옥에 넣지 않지만 무덤에는 넣는 사람들


닥치고 주무세요
다신 기다리지 마세요


아버지는 패배를 좋아하고
나 또한 패배를 잘 견딘다, 이를테면 매를 잘 맞는 아이처럼


가냐
네, 갑니다, 가고말고요, 엎드려 빌기 위해 또 가야 한단 말입니다!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창비








아이의 기차놀이를 보며 - 최금진



때론 수많은 세월이 한꺼번에 흘러간다
덜미를 잡히고 바짓단을 잡힌 채
아이가 힐끗 나를 돌아보며, 왜 회사에 가지 않느냐고 묻는다
늙은 어머니가 죽은 남편에게 하듯 내 밥을 차리며
먹어라, 먹어야 내일 또 먹을 수 있다
이 엉터리 같은 단절을 하나로 엮어서 겨울 스웨터를 짜는
아내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일까
깡패와 건달과 창녀가 특산품인 내 고향에서처럼
아이가 기차놀이를 한다, 이미 가버렸을지도 모를
중년의 나를 승객으로 태우고
소문과 소음이 저기 뒤에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터널
거기서 쏟아져나오는 검은 박쥐들처럼
식구들 얼굴이 매달려 있는 액자 속의 사진에
아이는 껌을 붙이거나 야광 별을 붙이면서 꽥꽥 운다
내가 나였다는 것이 영원히 루머에 묻히듯
이 무수한 소멸의 노선 아무 데서나 나를 내려놓고
아이는 검은 화차가 되어 떠나버린다
아버지는 너무 재미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떠났던 기차여행이 벌써 몇 번째인지 우리는
유희 속에 제 생각을 섞어서 말하는 법을 배운다
칙칙폭폭, 저녁 밥 끓는 소리가 어머니 입에서 뿜어져 나오고
새끼줄에 혹은 나일론 줄에 허리를 묶고
우리는 어두워지는 밤을 향해 또 떠나야 한다고 믿는다
놀이처럼 한꺼번에 너무도 많은 일들이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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