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숙 - 안상학

마루안 2018. 5. 11. 21:21



노숙(露宿) - 안상학



한때 일곱개의 어린 해를 거느리던 태양이
하루 하나씩 쏘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홀로
日월화수목금토 시공을 지나가는 서울의 지상
한때는 한 가족의 태양이었을 사내들이
지하철 출구에서 떠올라 보행명상 궤도를 돌아
지하철 입구로 스스럼없이 지는 날들이 월화수목금토日
분명히 정해져 있을 남은 일생의 날들 하루하루 축내며
수많은 태양이 지하도 깊은 계곡階谷에서 잠들곤 한다


-신선은 가족을 거느리지 않는다는 말을 가르쳐준 책을 잊었다


이슬은 낮을 모르고 무지개는 밤을 알지 못한다.
태양이 술을 마시고 우는 낮에는 세상의 몽중에
일곱 개의 어린 해들 이 무지개로 잠시 눈을 붙이고 간다
한때는 태양이었을 사내들이 술을 마시고 잠든 날은
일곱 개의 눈빛이 꿈속에서 이슬처럼 자고 간다
...사실은 세상도 사내들도 어느 시공에서 하룻밤 노숙중에 있다



*안상학 시집, 아배 생각, 애지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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