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왜행성 134340에 부쳐 - 박주하

마루안 2018. 5. 11. 21:51

 

 

왜행성 134340에 부쳐 - 박주하

 

 

아무도 그대를 문밖에 세워두지 않았습니다

속눈썹 젖는 낮은 새벽

뒤뚱거려도 귀한 그림자는 맑은 연못에 묻어두었으니

귀 막고 돌아가는 명왕성이여

그대를 보내는 어둠 곁으로

어느덧 벅찬 바람의 발굽 소리도 잦아들었습니다

그대를 가만히 생각할 적에 맺히던

둥근 슬픔의 옥빛 무늬를

누군가 사소한 눈물이라 빈정거려도 좋습니다

가슴을 찌르며 나직이 들어오는 푸른 새벽빛을

그대의 미증유의 법으로 받아 삼키겠습니다

아무도 그대를 문밖에 세워주지 않았을뿐더러

나는 나의 수많은 문지방을 부끄러이 여겼기에

밤마다 메아리로 心經 읊었습니다

그 가을의 어둠 창궐했으나

般若의 무현금에 귀를 기울이고 나니

그대와의 이별도 이젠 견딜 만합니다

홀로 깊어가는 무서운 밤들 수북해도

자책의 무거운 방들이 되지 않겠다고

그대는 그대의 미증유의 법으로 약속해주세요

언제나 내가 먼저 떠나왔으니

그대의 명부를 껴안고

칠십의 일생을 그대의 문밖에서 살겠습니다

 

 

*시집, 숨은 연못, 세계사

 

 

 

 

 

 

후안(候雁) - 박주하

 

 

들린다

머리 둘 곳을 찾는 순연한 발소리

 

회색의 후미진 골목마다

이지러진 태양을 파묻고

비석처럼 완강한 술병에 꽃을 심고

어딘가 숨었음직한 마을을 살피는 눈빛들

아득히 젖었으되 넘치지 않는 어둠이다

 

질주의 노동을 버렸으나

일생 동안 칼을 품어본 적 없는 까닭에

세상이 졸음에 겨운 그를 겨눌 일 또한 없을 터

 

사상의 거처를 버리고

하룻밤을 청하러 박스를 메고 가는 그림자가

지구를 짊어진 성자만큼이나 엄숙하다

 

아, 누수된 모래탑 속으로

한없이 걸어가는 여린 짐승의 저 뒷모습들

 

 

 

 

 

*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쓸쓸한 씨앗들이 있다. 
귀퉁이가 이지러진 묵정밭 끄트머리에 던져진 존재에게 물은 늘  부족하고 바람은 반드시 혹독함을 지니기 마련이다. 
고통이 삶의 이유가 될 순 없으나 일찍 불행을 맛본 씨앗은 어느새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 
거울 속의 사랑은 그 자체로 본영을 꿈꾸고 배반하는 허탈감을 반복한다. 
자유롭지 못하여 생살을 파내고서라도 넓히고자 했던 공간에 마음들은 때로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와 역사를 기록한다. 
그 질긴 끌림들은 모두 같은 씨앗의 처음에서 번진 것이다. 
고통의 크기만큼 행복이 감미롭다면 나는 아직 덜 고통 받았으므로 불행에 더 가깝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낯선 혹은 익숙한 - 서동균  (0) 2018.05.12
패배하는 습관 - 최금진  (0) 2018.05.12
아침 신파 - 허연  (0) 2018.05.11
노숙 - 안상학  (0) 2018.05.11
꽃이 나를 선택한다 - 백무산  (0) 2018.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