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이 나를 선택한다 - 백무산

마루안 2018. 5. 11. 20:53



꽃이 나를 선택한다 - 백무산



빌딩숲 그늘에 별나게 화사한 꽃이 있어
몸이 먼저 쏠려 다가갔지만
플라스틱 꽃이다
하지만 속을 다 본 뒤에도 설렘이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꽃은 어여쁘다


플라스틱 꽃아 너도 꽃이다
네가 꽃이기에 부족한 것이 무어냐
꽃과 꽃 아닌 것의 구분이 이 도시에서 무슨 의미냐
도시의 기대만큼만 피는 네가 왜 꽃이 아니겠느냐


너는 공장에서 찍혀 나온 것이 아니다
진짜 꽃들의 무정란에서 태어난 거다


폐기물을 위장하기 위해 피어야 하는 꽃
씨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꽃
유전자 조작으로 씨를 맺을 수 없는 꽃
별도 흙도 없는 곳에 갇힌 꽃
그 꽃들이 너를 낳았다


비애와 치욕의 유전자를 말끔히 제거한
아니, 비애와 치욕의 유전자만 보유한 무정란에서
치욕으로 환한  꽃을 피웠다


봉오리 맺는 일도 낙화도 허락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오직 피어 있음만 허락된다
우리도 착취당할 능력이 있는 동안만 생존이 허용된다
플라스틱 꽃아 꽃보다 네가 이 도시에서 더 꽃답다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변신 - 백무산



화장기 짙은 여자가 길에서 알은체를 했다
사람 잘못 봤나 목울대를 보니 아는 얼굴이다
예전에 한동네 살던 노상 침울하던 청년이다
공수부대 제대하고 부산 가서 요리산가 한다더라
여자가 되었다더라 지나가는 소문도 들었다


잡은 손의 감촉이 속살이다 그의 몸 모든 부분이
성기 부근일 것 같은 천박함이 후덜거린다


잘했다 잘했어! (엉겁결에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더러운 세상 볼 거 뭐 있어!
(이 말은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기 직전에 간신히 억눌렀다)


질식해서 죽는 줄 알았다구요!
(질식해서 죽어가는 여자를 끄집어냈단다)
죽하해!
(이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정말로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녀가 나를 보고 따라와보라고 했다
나는 왜 아직도 나를 다 졸업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마르고 닳도록 관행적으로 나인가
내 안에 짐승도 있고 바람도 있고 나무도 있고
기괴한 빛도 있고 야수들도 수두룩한데
따라가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 야수 한마리 끄집어내봐야겠다
나를 잡아먹도록





# 백무산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84년 <민중시>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등이 있다.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다수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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