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를 기다린다 - 고영민

마루안 2018. 5. 10. 19:03



아버지를 기다린다 - 고영민



옆에서 소변을 보던 아버지가
내가 손을 씻고 머리를 매만질 때까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요즘 들어 나도 점점 무언가를
끊는 게 힘들어졌다
털고 뒤돌아서면 그만이던 것이
이젠 뒤돌아서도 영 뒤가
개운찮다


술을 먹어도, 글을 써도, 사람을 만나도
뭔가 할말을
다 못 하고 나온 것만 같다


휴게소 화장실 소변기에
젊은것들이 시원하게 오줌을 갈긴다
다시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와
볼일을 보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버지를 기다린다



*고영민 시집, 구구, 문학동네








중년(中年) - 고영민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중년이라고
중얼거려 보았다


어제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옛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고스란히 불려 나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가 내가 아닌,
아버지를 부축했다
잠결엔 아버지가 내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죽은 아버지가 내 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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