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집 - 이종형

마루안 2018. 5. 10. 19:31



바람의 집 -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수화식당 - 이종형



오래전 삼돌이네 집이 사라지더니
입춘굿 한마당 벌어질 때마다
시끌벅적하던 수화식당도 끝내 문이 닫혔다
노부부가 투박한 손길로 토렴해주던
순댓국밥 뜨끈한 국물
다시는 맛볼 수 없을 배지근한 이야기와
낄낄거리며 봄맞이하던 온기,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나


감칠맛 나는 사람들 하나둘 떠나가는 세월과는, 또
어떻게 잘 헤어져야 하나
오래전 골목에 들기 전엔 미리
각오해야 할 일이다


희미해지는 추억이 걷힌 자국들은
마음 어딘가에 깊게 고여 있을 터이니
그 쓸쓸함을 찾아 잠시 허둥대도 좋을 일이다


입춘의 골목길을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기억들


이 봄날, 그리운 이들을 어디 가서 만나야 하나
어디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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