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낡은 등산복에 대하여 - 박수서

마루안 2018. 5. 9. 22:09



낡은 등산복에 대하여 - 박수서



지난 밤 꿈
아버지
자리에 눕기 전까지
일주일이면 몇 번은 땀에 젖어
지친 통풍과 함께 돌아왔을
아버지처럼 늙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낡은 등산복을
야윈 어깨 박쥐처럼 벌려 입으신다
남해에 간다 하시는데
나는 눈물만 흘리다
아버지의 발등에 말뚝을 박는다.
가지 마세요, 아버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꽃이란 꽃은
모두 꽁꽁 얼어 죽었어요.
봄꽃 피면
지가 징허게 향내나는 술상 받아 드릴게요.


조선 팔도 이 산 저 산 다 올랐을
아버지의 낡은 등산복을 바라보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꽃을 본다.



*박수서 시집, 박쥐, 문학의전당








청춘 극장 - 박수서



내가 자주 가는 서신동 먹자골목을 찾다보면
청춘극장이라는 술집이 있다.
주꾸미 먹물처럼 시꺼멓게 바닥을 평정하던
왕년의 무쇠주먹 사장님과
금속공예로 美的주름이 단단하게 잡힌 사모님이
바야흐로 청춘극장을 올렸는데,
이것이 정말 극장에서나 나올 만한 멜로일 것이다
죽을 똥 말똥 부지런히 청춘극장의 필름을 돌려서
이제, 먹고 살만 하다 생각했더니
사모님이 유방암 2기로 항암치료를 받는단다.
세상 별의별 억울한 일도 많지만 부지런히 사는 사람에게
고통이 더 많다.
뒤집어 병을 거꾸로 들면 바람세는 소리 들리듯이
빈 수레가 아직도 쿵쿵거리는 세상일 것이니,
그렇다고 세상 벽이란 벽은 다 깨부수며
사자처럼 으르렁거릴 수도 없다.
그래봤자 남는 건 끝 모를 눈물뿐일 것이니
죽을 똥 말똥 살았으니
이것도 복이라 생각하고 자자 잔 청춘극장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오르는 새 필름을 돌려보자.





*자서


시는 밥풀이다
언제 흘릴 줄도 모르면서
허겁지겁 주워 먹는다.
시를 물어뜯고
빨고 핥고 하다보니
혓바닥에 독이 올랐다.
해독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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