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떠도는 소문 - 권오표

마루안 2018. 5. 10. 19:18



떠도는 소문 - 권오표



떠도는 소문은 썩은 모과처럼 검고 눅눅하다


산 아래 대나무집, 아비가 누구인지 소문만 무성한 당골네 아들은 동네에 온 빨치산 따라 산에 들어가 난리 뒤에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홀로 뒷동산에서 종일 들 건너 강만 바라보다 돌아오는 그를 두고 어른들은 뒤에서 연신 혀를 찼다


지난 밤 변소에 다녀와 다시 잠을 청하려다 선득한 기운에 뜬금없이 어릴 적 뒷동산 등성이를 넘기 전 멈칫 서서 고래 돌려 바라보던 노루의 처연한 눈빛이 생각났다


아침에 여름 내내 방바닥에 가득 핀 곰팡이를 잡기 위해 마른 쑥을 모아 피웠다


저물녘에는 울타리의 옹이처럼 단단한 해바라기 그림자를 동쪽으로 옮겨 놓았다


떠도는 소문은 썩은 모과처럼 검고 눅눅하다



*권오표 시집, 너무 멀지 않게, 모악








입춘(立春) - 권오표



봄이어도 산으로 난 길은 쓸쓸하다
이맘때면 습관처럼 발가락 새가 가렵다
나물죽으로 건너 뛴 끼니의 어질함이
아지랑이를 부르는지도 모른다
몇 해째 들지 않은 처마 밑 제비집도 헐어 있다
가난한 아비는 막 푼 고봉밥처럼 푸지게 김 오르는
퇴비를 지고 산 아래 다랭이 논으로 간다
시궁쥐를 쫓다가 대나무집 문 앞에 걸린
불 꺼진 등(燈)과 만난다
이 집 노망난 할멈은 여러 날 만에 아랫방죽에서
굼벵이처럼 퉁퉁 불어 떠올랐다
몇 안 되는 초상 마당의 수런대는 소리가 빈 쌀독 같다
가려운 발가락은 신발굽으로 문질러도 여전히 가렵다
참새 떼는 좁쌀 같은 허기진 울음을
탱자 울타리에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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