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의 매질 - 김병심

마루안 2018. 5. 10. 18:56



봄의 매질 - 김병심



제자리에 돌아와 앉으라
정령의 말이
깨어나는 안개 속에서
까마귀가 일어선 빈 둥지에서
또렷한 향기로 퍼지면
도시를 헤매던 머리가 맑다


용강동에 매화 피었다
절물 삼나무 숲에서 복수초가 감자처럼 드러나면
공동묘지의 삐쭉인 푸성귀 밥상이
수목원 진흙탕에 갇힌 연못과 수선화 길목이
이호바다의 검은 진주가 흔들린다


매번 순리를 좇고도
아파야 깨닫는 미련한 사랑,
봄의 매를 맞는다


다시 어른이 되어야 할 때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방패를 치워야 할 때
성처 내기를 좋아하는 못된 사랑이
봄비 속에서
다시 무릎을 꿇어야 할 때



*시집, <신, 탐라순력도>, 도서출판 각








가을 한라산 - 김병심



허둥대는 내 뒷덜미를 잡고 귓속 가득 너만 이야기하는 가을


낙엽이 나자빠진 한라산이
다만 붉어져 어쩔 줄 모른다
너와 나를 어쩌지 못하고 숨기는 저 산,
탄로날 변명 혹은 뻔한 거짓말
부끄럽지 않게 너와 내가 놀던 산,
저 혼자 속이 타는지 확확 번지는 불안으로
우리를 붙잡으려 활시위가 붉다


순리대로, 반듯하게, 정해진 대로
붙잡지 않고 달아나는 우리는
신탁의 영원한 도망자





# 김병심 시인은 1973년 제주 안덕면 사계리 출생으로 제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자유문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더이상 처녀는 없다>, <울내에게>, <바람곶, 고향>, <신, 탐라순력도>, <근친주의 나비학파>, <울기 좋은 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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