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놓치다, 봄날 - 이은규

마루안 2018. 5. 9. 21:50



놓치다, 봄날 - 이은규



저만치, 나비가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란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 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른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은 날들이 잠시 잊힌다


이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앉아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미간(眉間) - 이은규



눈쌉과 눈썹 사이
미간이라 부르는 곳에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
고인 그늘에 햇빛 한줄기 허공의 뼈로 서 있을 것


최초의 방랑은 그 눈을 심안(心眼)이라 불렀다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디딜까
나무 그늘, 그의 미간 사이로 자라던 허공의 뼈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나무가 편애하는 건 꽃이 아니라 허공
허공의 뼈가 흔들릴 때 나무는 더이상 직립이 아니다
그늘마다 떠도는 발자국이 길고


뒤돌아보는 꽃처럼 도착한 안부, 어느 마음의 투척(投擲)이 당신의 심안을 깨뜨렸다는 것
돌멩이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도 안 되더라는 말은 완성되지 않았다
온전한 무게에 깨진 미간의 기억이 치명적이었다는 소견, 왜 미간의 다른 이름은 명궁(命宮)일까


사람들이 검은 액자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화염의 칼날이 깨끗이 발라낸 몸, 뼈가 아직 따뜻한데
직립을 잃은 허공이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눈인사 없이 떠난
당신이 나무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봄날


투척의 자리에
햇빛의 무늬, 밀려가고 밀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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