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식사라는 일 - 김경미

마루안 2018. 5. 9. 21:24



식사라는 일 - 김경미



기러기 같은 입술
하루만 닿아도 은수저가 변한다 치약으로 닦아낸 헝겊이 새까맣다
- 식사는 검은 침의 일


형광등처럼 새하얀 북극곰
너무 새하얘서 안 보일 지경인데
바다코끼리를 먹느라 가슴팍이며 다리까지 온통 다 피 칠갑이다
- 식사는 피범벅의 일


치타의 눈 밑에는 검은 줄이 있다
사냥 때 햇빛의 방해를 막아준다
야구 선수들도 흉내 내는 그 검은 눈밑 차양
- 식사는 신의 일


개미는 기차와 설탕통을 좋아하는데도 허리가 잘록하다
나무들은 어떤 밥상에도 불려 다니지 않는다 앉아서 잎만 벌리면 된다


그 모든 식사가 서로의 꼬리를 문 채
하늘로 날아오른다
기러기 떼처럼 거대한 입술 하나
구름을 먹으며 멀리 사라진다
- 식사는 소멸의 일
 


*시집,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지성








소읍 기행 - 김경미



소읍의 식당에 앉아 야바위꾼처럼 수저를 돌려본다
음식 솜씨 없어도 식당을 해야 하는 주인과
맛없어도 먹어야 하는 손님
더 괴로운 쪽을
솓가락이 정하도록 한다


발목보다 손목이 편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귀가 무릎보다 많은 걸 들었다고 할 수 없다
숟가락은 멈출 생각이 없고
창밖으로 찌든 머리와 무릎 나온 추리닝과
3월 추위 속의 슬리퍼가 자주 지나간다


간신히 모래를 털고 나서는 식당 문
수저가 구두를 향했다
낯선 곳에서는
구두 굽이 달아나야 제격이다


비교적 싼값에 새로운 걸음을 얻었는데
순식간에 날짜를 착각한 폭설이다
불에 덴 것처럼 차갑고 추운데
옷이 없다 이번엔 외투를 사야 하나


겨우 10분쯤이었다
나도 잘 안다
5분에서 10분이면 그칠 일을 무섭게 저지르고 보는 것


어느덧 구식 다방
솜 뜯긴 창가 소파 자리를 권하는 어둠
얼굴 짙은 마담을 찾아온 중년의 아저씨들


낯 뜨거운 농담을 들으며
마담과 남자들과 밤
모두를 향해 다시 수저를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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