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나무처럼 우리가 - 이강산
잎 떨구는 나무를 보고
가을엔 생각했다
저것도 다 제 삶의 방식대로 핏줄 끊는구나
한 겹씩 살점 늘어가는 봄을 겪어왔으므로
미련 없이 허물 벗는구나
썩은 배추밭에서 신도시로
폐광촌으로
길을 옮기며 생각했다
우리 생존의 희망이 한고비를 넘길 때마다
슬픔도 뚝살을 더해가는구나
일정한 흐름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물 벗고 봄 기다리는
가을나무처럼
모자라거나 넘치는 만큼 우리가 이룰 일들이
제때를 기다린다 여겼다
싸움도
사랑도
잠시 쉬는 듯한 새벽 거리에 서서
사람들의 가을이 되고 봄이 되어줄
아침을 기다리며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실천문학사
꽃불 - 이강산
가을이라 꽃핀다고
한 송이 활짝 피어서야 꽃이겠는가
이제 막 벙그는 꽃대궁들이
바람에 흔들리다
낮은 키 못난 대로 서리맞을 때
저 혼자 살아서야 산 목숨이겠는가
우리 돌아가는 변두리의 밤
길가에 코스모스 산길에 망초꽃
꽃불 놓고
저렇게 무더기무더기 피어서 아름답지
우리 혼자 일어나
언제 힘깨나 쓴단 말 들었던가
허기진 날 많아도
하나 둘 스며들어 모여살 듯
한없이 약한 저 꽃들이
새벽 출근길의 시내버스 창가에
떼지어 서서
봄이나 가을이나
꽃 한 송이 잘 피어서 소용없다고
저 혼자 우뚝해야 볼품없다고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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