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초의 순장 - 박순호

마루안 2018. 5. 6. 20:13

 

 

기초의 순장 - 박순호 


평생 떠받들고 있어야 할 엎드린 생이 있다
등에 지고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무거운 생이 있다

가가호호
자동차, 가전제품, 가구, 책이 쌓여가고
식구가 늘어난다
구둣발이 등뼈 위를 눌러 찍을 때마다
지하수위가 바뀌어 누수되는 몸
참다못해 벽체에 금을 그어놓곤 하는데
저리 고약한 업(業)이 또 있을까

재건축 현장
흙을 파헤치는 곳마다
도난당했던 내 기억의 늑골이 발굴된다
매립되었던 꿈의 모서리가 노출되고
뾰족한 기억으로부터 물길이 치솟는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의 이름이 기록된 수첩과
낱장의 설계도, 바람 섞인 햇살
부러진 손톱과 핏방울이 말라 있는 기초의 순장

거대한 뿌리가 햇빛에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


*시집, 헛된 슬픔, 삶창

 

 

 

 



땜빵 - 박순호


1

소나기가 덜 마른 미장 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다발성 흉터를 남겨놓고 그쳤다
바람 든 무처럼 숭숭 뚫려 있는,
위험한 결핍
땜질, 채움, 사춤보다는 귀에 쉽게 들어오는 말

땜빵이라는 두 글자에는 벌어진 간격이 있다
엇갈린 지점이다

2

벽돌로 쌓은 욕실에 파도가 높아질 기미를 보인다 사각의 앵글 안에서 남은 인생을 조명하겠다던 곰보투성이 김씨 얼굴에서 한 점을 찾는다 가장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며 땜빵이란 말을 입 속에 담아두곤 하는데

김씨의 삶은 흑백이 아니다 그건 공장을 떠돌아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다녔을 때 얘기다 지하철 벽 타일 장식에 끌려 그 길로 곧장 바닥과 벽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한다 얼굴 절반을 가렸던 머리를 자르고 밝다, 구멍마다 빛의 살점을 떼어내 땜빵한다

낚시를 좋아하는 타일공 김씨가 파란 타일을 들고 섰다
욕실에 두 평 남짓 해안을 펼쳐놓고 파도를 기다린다 
바다와 바다를 가르는 각진 선이 불러오는 갈매기
욕조에는 해초가 무성하고 귀신고래가 산다

바다를 한 장 한 장 이어가는 등 뒤에서 풍기는 비린내
김씨의 욕실은 배가 되어 너울성 파도를 가르는 중이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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