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비, 통속적으로 - 심종록

마루안 2018. 5. 7. 19:34

 

 

봄비, 통속적으로 - 심종록


봄비 맞으며 떠난 기차 밤비 되어 도착하는 순천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충분히 젖어버리는
육식공룡 같은 대학병원

사각의 제모를 쓴 수위 주차료 정산하는 주차장 지나
공룡의 항문쯤으로 짐작되는 곳을 향해 걸어간다 영안실은 필시
후미진 곳에 있게 마련이다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배설해내는
장기의 끝부분처럼

응급차에 실려 공룡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가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싸늘한 시신이 된 너는
지금 생의 마지막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잠시 구치중이다
너는 없고 환하게 웃는 사진 한 장이 나를 맞이한다

언젠가 너는 분명 저렇게 웃었을 텐데 도무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네 웃음이 더 쓸쓸할지도 모른다 웃는 사진 앞에 앉아
빚 갚으로 왔다가 빚만 남기고 떠나는 세상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다가 더는 회의할 것이 없어진 나는
잠시 유보해 두었던 이별을 끝내 감행한다
공룡의 항문 속을 서둘러 빠져나온다

열차 시간은 멀었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통속적인 봄비 속에서 나 또한 통속적이 된다
통속다방 미스 통이 통속적이게도 그리워진다
비에 젖는 순천 버스터미널 뒷골목 통속다방 미스 통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통통한 젖무덤 위에 트럼펫
분다는 애인이 새겨주었다던 나비 문신
살짝 내보이던 문신은 나비 되어 날아가고 젖가슴만 출렁이던
통 양은 없고 통속다방도 없고 비에 젖은 거리는 여전히
그 시절만큼이나 통속적이어서

나는 낡은 음악다방 지하 계단을 내려가 엽차 잔에 도라지위스키 따라놓고
봄비나 듣는 것이다 박인수도 듣고 이은하도 듣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불현듯 사라지는 것이리라
몸 비틀며 노숙하는 나뭇잎처럼 통속적으로


*시집, 쾌락의 분신자살자들, 북인



 

 


수색 - 심종록


이상하게도 수색이라는 이름에선
아련한 물빛이 감돈다 빛바랜 모노톤의 사진처럼
시커먼 석탄차가 기적을 울리며 멈춰 서던 곳
하얀 교복을 입은 갈래머리 소녀가 책가방으로 무릎을 가리고
수국처럼 서 있던 곳 빨간책을 보았고
얼굴이 갸름한 파마머리 아줌마에게 순결을 바쳤던 곳
통음을 하고 면도날로 손목을 긋던
열아홉 살 애인을 매정하게 뿌리쳤던 곳
선홍의 피가 동백꽃잎처럼 뚝뚝 떨어지던 날
백골단에게 머리통이 터진 친구를 두고 도망치다가
수세식 변소 아래 몸을 숨기고
한나절을 주문처럼 주기도문만 중얼거린 것도
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
함부로 피었던 청춘이 시드는 건
순식간이다 언제나 한 발자국 늦게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서는 노을
하느님이 여분의 방황을 허락한다면
긴 그림자 켜켜이 접어 주머니에 쑤셔넣고
수색으로 돌아가리라
잔혹하게 나를 수색하리라

 

 

 

# 심종록 시인은 경남 거제 출생으로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 <쾌락의 분신자살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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