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무겁고 너무 가벼운 허무 - 김인자

마루안 2018. 5. 6. 19:10

 

 

너무 무겁고 너무 가벼운 허무 - 김인자

 

 

이제 다시는 허무의 투망질에 생애를 걸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적이 언제였나. 그러나 아침이 오면 다시 그물과 배를 손질하고 돛을 올렸다.

 

설마, 한 번쯤은 내 생애에 준비된 만선이 없을라구! 낡은 배를 띄우는 이유는 그뿐이 아니다. 그물 가득 걸려 올라오는 허무쯤이야 이제는 웃을 수도 있지만

 

아, 그렇지 어디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게 그물뿐이었나. 예전에 아버지는 일러주셨지. 그물이 아니면 낚시를 던져보라고,
저 바다 속에 전생을 걸고 단 한 마리라도 건져 올릴 고래가 있다면.

 

 

*시집,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여음

 

 

 

 

 

 

아름다운 것은 독이 있다 - 김인자

 

 

넓은 동해바다에서 끊임없이 나를 유혹해 오던 것은 해파리떼였다. 어디서부터 헤엄쳐왔는지 어느 땐 물위를 까맣게 덮고 있어서 그들 아름다운 춤사위에 공포를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서운 독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 때 내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아름다움일 뿐


어느 날 해파리에 그만 쏘이고 말았다. 독은 순식간에 번져 온몸에 빨간 반점이 생기고 퉁퉁 부어올랐다. 어른들은 다시는 해파리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조금씩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현란한 아름다움에는 더욱 의심이 갔다. 경계심이 발동했다. 그후로 해파리떼의 환상적인 춤을 볼 때는 전과는 달랐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리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름다운 것을 의심해야 하다니.

 

 

 

 

# 김인자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이 있다. <아프리카 트럭 여행>, <걸어서 히말라야>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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