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이 지는 일 - 배홍배

마루안 2018. 5. 6. 19:56



꽃이 지는 일 - 배홍배



살구꽃이 졌다


떨어진 꽃잎은 잊혀졌지만 꽃 진 자리는
점점 자라서, 아이 울음만큼 자라서
직박구리가 목이 쉬어 떠났다, 가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새가 앉았다 간 자리를 쳐다보아도
아무리 쳐다보아도


꽃잎을 쉬이 잊은 일에 대한 치밀한 반성이나
가책 말고는 달리


설렐만한 일은 없었으므로


살구꽃 사진을 침실에 걸어두고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새가 떠나지 않았다면
침실의 어두운 불빛 아래가 아니었다면


꽃잎 속에서 어떤 그리움이 무릎을 바짝 세우고
나를 내려다보는 줄 알기나 했겠나


살구 알이 자라서 드리우는 동그란 그림자 안이
그처럼 환한 줄 생각이나 했겠나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경전선 - 배홍배



늙은 의사가 힐책하듯 흉부 사진을 내걸었다


검은 골짜기마다 달이 뜬 흔적


달이 지면 깜깜한 골짜기는 훤히 보일 것이고
달빛이 내다버린 몇 년이 거기 얼룩졌을 것이고
얼룩 아래는 남은 몇 년이 더 텅 비었을 것이니
그림자로 기척 없이 진찰실을 나왔다


더 이상 낯설지 않게


풀풀 걸음은 날려서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나는


살아서 바람이었을까


의사의 처방처럼 알 수 없는 시간표
안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호, 그땐
완행열차에서 왜 상한 눈물 냄새가 났을까


채 마르기도 전에 남겨진 것은


얼룩진 세월과 텅 빈 시간의 틈새
아득히 비둘기 떼 나부끼는 온몸
그리운 하루일 때
가슴까지 흘러온 것은


다시 만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만큼의 깊숙한 달빛에 퉁퉁
불은 몸뚱이를 여러 겹 벗겨내어 그곳에 아직, 나는


연서를 쓰고 있었다


두근두근, 흰 알약 같은 달이 유혹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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