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쩌면 오늘이 - 여태천

마루안 2018. 5. 4. 21:46

 

 

어쩌면 오늘이 - 여태천


하루 종일 보채던 아이가
한밤중에 품속으로 파고든다.
엄습하듯
생각의 먼 후대를 불러들이는 너.

너를 안고 불 꺼진 오늘을 천천히 걸어 본다.
납작해진 너를 안으면 안을수록
내가 나를 안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 하면 할수록
나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내가 아니라 너라는 생각

자고 나면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너는 눈을 또렷이 뜨고
무거워진 밤을 자꾸만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밤은 깊고 또 깊어져
이 밤의 공기를 다시 만질 수 없는 때도 있어서
오늘이 백년의 기억보다 더 깜깜하다.
그때마다 후대의 아주 먼 생각이
가만히 왔다가
가만히 가는 중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민음사


 

 



속기 - 여태천


오후의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의 모양과
그날 밤하늘에 얼마나 많은 별이 떠 있었는지
끝내 기록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엔 너무 깊게 들여다보지 않아야 하는 곳도 있다고
서툰 글씨로 겨우 기록해 두어야만 했다.

213번째 응급 환자가 남긴 것은
시든 꽃 한 송이를 닮은 아내와 막 잠에서 깬 얼굴의 아이
여자가 슬픔을 견디려는 눈으로 흐느끼고 있을 때
212라는 번호를 오래 들여다보며
나는 참으로 민망했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여러 번 옮긴 주소
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않게
그의 인간적 생존을 확인하는 것들이
오차도 없이 재빨리 기록되자마자
파본의 생은 그렇게 명백해졌다.

너무나 허술하게 마감한 한 사람의 하루와
거짓말을 해야하는 여자의 입술과
거짓말로밖에 말할 수 없는 사실들이
이렇게도 다정하다니.
그 시간이 무색하게
창밖으로는 비가 오래오래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이 사실들을 기록해 두어야 했지만
팔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사이에
나는 아팠고 복잡해진 머리는 말을 잊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문득 가로등의 불빛만큼
삶이 안전하다고 꼭 적어 두고 싶었다.

모든 것은 언제까지나 두 번 되풀이되지 않아서
병실과 병실이 이렇게 평화롭다.
나는 공연히 허공을 만져 본다.
말랑말랑한 슬픔이
미래로 미래로 자꾸만 퍼져 나가자
팔은 생장점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여태천 시인은 1971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국외자들>, <스윙>,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가 있다. 2008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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