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잎의 비행 - 윤의섭

마루안 2018. 5. 5. 22:12



꽃잎의 비행 - 윤의섭



일 초에 오 센티미터

벚꽃 떨어지는 속도


일 초

멀리서 바람 우는 소리 신산하다 겨우내 눈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도처에 꽃이 피었지만 애초부터 시든 적도 진 적도 없었다 사람이 피고 졌을 뿐 나비 날개 스쳐 가고 달빛만이 영글었을 뿐 다만 어느 밤엔 여태껏 빛나던 별이 죽어 보이지 않고 만났던 얼굴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곤한 낮잠 깨어 보니 겨우 일 초만 흘러간 봄날


이 초

오래된 구름은 조각달이 되고 오래 날던 비행기는 영혼이 되고 오래 비추던 햇살은 한 사람이 되고 오래 슬픈 이는 술독이 되고 오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람은 벚꽃나무가 된다 이제 이 초


삼 초

길을 잘못 들어 처음 보는 풍경 속으로 빨려 갔지만

저만치 세워진 이정표는 좀 전에 본 이정표와 똑같다

너도밤나무 한 그루도 마찬가지로 서 있지만

이런 데를 지나쳐 온 적은 없다

우연히 마주친 산사의 스님은 우리를 바람 대하듯 무심히 바라본다

저 산 아래로 귀환하여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풍경에 지는 그늘처럼 좀 더 남아 있기로 한다


영원히 착륙하지 않는 꽃잎의 비행

그사이 봄은 지나가고 흐드러진 눈꽃만이 떠다니네

한 꽃잎에 한 시절

백만 꽃잎에 한 세상



*시집, 마계, 민음사








터미널 - 윤의섭



직행버스는 서서히 터미널로 진입했다

가을걷이 끝난 황량한 들판에서 혼자 올라탄 버스 안에는

승객 서넛이 누런 저녁 햇살에 덮여 잠들어 있었다

내릴 곳은 이미 정해졌고 다만 도착 시간이 어긋날 뿐이었다

터미널에 정차한 수많은 노선의 버스는

차례를 기다리는 경주마처럼 조금은 긴장해 보인다

방금 내장을 비워낸 낡은 버스의 갸르릉거리는 숨소리가 창틈으로 들려온다

승차 대기실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선

연신 생명보험 가입 광고가 흘러나오고

매표소에 앉아 있는 무료한 여직원은

소리 구멍 뚫린 유리창 너머 쏟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바라본다

겨울로 가는 승차권이 저렇게 매진되고 있다

해남에서 진주에서 포항에서 속초에서

올라온 버스들이 터미널에 머리를 박고는 잠깐이나마 숨이 멎는다

먼 길을 떠나왔고 다시 먼 길을 떠나려면

쌓인 여로는 죽은 자의 기억인 듯 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태어난 곳을 다시 찾아오는 연어처럼 버스는 터미널로 간다

햇살 받으며 터미널에 줄지어 선 버스의 가지런한 등 비늘

터미널은 품 안에 들어온 모든 새끼들의 일생을 점지해준다






*自序


들여다보면 마법의 세계다.

시를 쓰지 않아도 천지에 시가 자란다.

환상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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