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편, 봄날은 간다 - 이덕규

마루안 2018. 5. 4. 21:20



단편, 봄날은 간다 - 이덕규



나른한 봄날
인적 드문 산사에 올랐다가
뒤꼍 작은 암자 앞 댓돌 위에
남자 흰 고무신과
굽 높은 여자 검은 하이힐이
나란히 올려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순간, 빠르게 돌아가는
영사기 필름 부하 걸리듯
마당 끝 미륵불 펄럭거리는 심장
피돌기 급류에 휩쓸려
나는 멀리 앞산 중턱
가설 스크린 하얗게 둘러치고
한창 상영 중인 산벚나무
한바탕 단꿈 속으로 젖어드는데


저런, 언제나 그렇듯
달콤한 꿈은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문을 확 열어젖히거나
열 받은 필름이 맥없이 툭, 끊깁니다


무슨 스토리였을까요
캄캄한 암자 안을 향해
공손히 합장하고 돌아서
산 아래로 목련꽃 지듯 내려서는 여자
그새 눈매가 많이 젖었습니다



*시집,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사








간발의 차이 - 이덕규



밤낮으로 전국 공사장을 떠돌던 그가 피곤한 발목 하나를 터널 굴착 현장에 빠뜨려 잃어버렸다
사는 게 무슨 쇼트트랙 경기라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아슬하게 원심력을 견디며 뺑뺑이 돌다가 작두날 같은 생의 결승선에
그렇게 다급하게 한 발을 쓰윽 밀어 넣었나


간발의 차이로 싹둑 잘린 발목 하나가
깨금발로 총총 다음 생을 준비하러 갔으니 그는 졸지에
첨단을 넘어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다


잘린 신경 끝에 욱신거리는 미열의 불을 켜고 보면
곳곳이 수렁이고 함정이었던 바로 사십 센티 아래가 이제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땅인데
남은 한 발로 그 미지의 땅을 딛고 서면 더 이상 내디딜 발이 없는 여기가 바로 극지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외발로만 설 수 있는 칼날 정상이다
더 이상 먹이 찾는 놀이가 무료해진 백로가 가슴속에 감춘 다리를 꺼내 땅을 박차고 날아가듯
품속에서 소주병을 꺼내 들이켜던 그가
어둠 속 넓은 보폭의 행성들을 쿵쿵 울리며 뛰어가는 발목 하나를 좇다가 기우뚱,
양팔을 퍼덕거리며 곧장 사람들 발아래로 몸을 굴린다


사람이 무너져봤댔자 겨우 이 미터도 안 된다 제 키만큼만 무너지면 죽음이다
그는 오늘 두 번이나 치욕스럽게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
정상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삶과 죽음에 양다리 걸치고 사는 그는 이제 살아서 죽어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 오래 전의 시집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시를 발견한다. 이제가 제대로 들어온 시가 읽을수록 마음에 박힌다. 기가 막히다는 표현이 딱 맞는 시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늘 내 인생에 불순물을 섞으면서 살았다. 이런 시를 읽다 보면 그것마저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나와 관계 없는 것이 하나도 없거늘,,,, 어른 되기는 아직 멀었는가. 좋은 시가 나를 철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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