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정체 - 조기조

마루안 2018. 5. 2. 19:47

 

 

나의 정체 - 조기조

 

 

나보다 나은 듯한 사람을 만나면

까닭 없이 예, 예 조아리며 굽실거려야 한다는 생각이

내 염색체의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모양이다

어느 옛 시절부터 내 할아버지가

매를 맞으며 배운 이치일 게다

또 나보다 못한 듯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곧 죽어도 참지 못하는 불뚝성 같은 것이

내 염색체의 어느 부분에 물들어 있는 모양이다

그것 역시 어느 옛 시절의 내 할아버지가

매를 맞다 맞다 깨달은 옷자락 핏물 같은 것일 게다

 

그런 두 가지 것을 생각하자니

참 더러운 세상에서의 인간말종형이

바로 나의 정체라는 걸 알겠다

 

이제 인간 복제도 마음먹기 달렸다 한다

어느 훗날에 내 족속 가운데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면

나보다 못한 듯해도 배알이 뒤틀려도 친절히 했던 것과

모자라는 밥을 나눠 담는 손길 같은 것과

죽은 자를 문상하던 때의 마음 같은 것과

갓난아기의 손발을 어루만지는 뜻과 같은 것

벌 나비 꽃과 풀잎들을 보며 춤추고 노래하던 것들

어렵겠지만 애써 고르고 찾아내어

그것으로 너희의 정체를 삼고 유전하라.

 

 

*시집, 기름 美人, 실천문학사

 

 

 

 

 

 

모토를 바꾸다 - 조기조

 

 

출근을 해야 할 발길이 산으로 향한다

때론 쉬이 가며 어느 데는 박박 기어

개울을 건너 바위를 넘어 산에 오른다

정상에 올라 높은 빌딩들이 솟은 시내를 향해

여봐란 듯이 함성을 질러도 보지만

때가 되어 고파오는 뱃속은 어쩌지 못해

무료 공양을 한다는 절에 줄을 서 보는데

요즘 산 찾는 人口가 늘어나

어쩔 수 없이 돈을 받게 되었다며

젊은 스님은 시주함을 가리킨다

문득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오래도록 모토 삼았던 백장의 어록을 떠올린다

이왕 줄선 이 가운데 몇은 슬쩍 비집고 들어가기도 하건만

긴 밥줄에서 슬며시 빠져나오며

나의 모토를 버리기로 한다

지난날 우리가 파업을 하며 자본가를 향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 부르던 노래

또한 틀렸음을 생각한다

내가 섰던 밥줄에서 내쫓김을 당하며 생각한다

자본가도 먹고 마셔야 하고

일하지 않는 자도 먹어야 산다라는 말

새로운 모토로 삼기로 했다.

 

 

 

 

# 조기조 시인은 1963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낡은 기계>, <기름 美人>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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