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복숭아나무 아래서의 한낮 - 박이화

마루안 2018. 5. 1. 19:38



복숭아나무 아래서의 한낮 - 박이화



복숭아 나무 아래서의 한낮은
얼마나 느리고 게으르고 행복할 것인가?
일생,
독한 그리움에 취한 나는
이내 드릉드릉 코를 골 것이고
그러면 바람은 바람대로
봄볕은 또 봄볕대로
내 젖무덤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지분대겠지
더러는
내 무릎과 무릎 사이 분주히 들락이겠지
아, 늙은 복숭아나무 아래서의 한낮
어느새 내 꿈은 붉고 달콤하게 숙성해
낡은 술통 같은 내 몸을 향기롭게 채워주겠지
그리하여
그 마흔 그늘 아래 뿌리내린 저 나무
이 한 몸 벌컥벌컥 다 비우고
취한 듯 불콰히 꽃 피우겠지
잠시 등 굽은 세월일랑 잊고
왁자히! 술 냄새 풍기며
흥청망청 꽃 피우겠지



*시집, 그리운 연어, 애지








봄꿈 - 박이화
  


나는 가끔
꽃의 향기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꽃이 씨앗으로 그 씨앗이 다시 꽃으로
수수만년 반복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럼 꽃이 질 때 잠시 꿈처럼 훅,
사라진 향기는 어느 구천을 맴도는 것인지
어느 시공을 떠돌다 다시 봄날
나릇한 풋잠에 현몽하듯 나타나는지
또한 그럴 때
약속대로 꽃이 향기를 부르는 건지
향기가 세세연년 익숙해진 제 몸으로
영혼처럼 훨훨 날아오는지
나는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허나, 그런 거라면
나 당신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다
우주의 인연망엔 이처럼
꽃의 향기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당신이 어찌 무슨 수로 나를 도망칠 수 있을 텐가?
하여, 다음 봄꿈에 나 꽃으로 몸 받으면
그리움 툭 치며 어지러운 향기로 도발될 당신!





# 속된 말로 죽인다는 말이 있다. 시에다 이런 표현을 하면 어쩔지 모르겠으나 정말 죽여줄 정도로 좋다. 우주의 인연망엔 꽃의 향기조차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마디로 쥑이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