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과꽃 향내에 길은 아득하고 - 임후남

마루안 2018. 4. 30. 19:42



사과꽃 향내에 길은 아득하고 - 임후남
-부석사에서



절이 가까워질수록
사과꽃 향기가 진해졌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면
등 뒤로 멈춰 서는
산 그림자


뒤뚱거리며 아이는 혼자 계단을 올라
무량수전 큰 부처님 앞에 이르러
사람들을 따라 합장한다
아멘,
뒤뜰 돌부처님 세 분
한꺼번에 웃는다
아이의 이마에서 사과꽃 향내가 피어난다


그림자끼리 서로 의지하며
산은 더 먼 산을 만들어낸다
다람쥐 한 마리
무량수전 앞에서 사람들이 버린 사과 조각을 먹고
나는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있을 해우소로 간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사과꽃 속에 아득하고
발 아래 소백산은 너무 가까워 무섭구나
무량수전에 들어간 아이는 나오지 않고



*시집,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 북인








찬밥 같은 안부 - 임후남



올 봄에는 복사꽃마을에 사는 선배를 만나러 갈 것이다
복사꽃 피는 계절마다
복사꽃 지는 계절마다
그리고 복숭아가 익는 계절마다
나는 복사꽃마을에 사는 선배를 만나러 갈 것이다
생각했다
복사꽃 피는 계절에 그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간장 한 병 사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을 따라
복사꽃 날리는 길들을 따라가고 있을까
그만 복사꽃 아래 주저앉아
불쑥 지나온 길들을 더듬고 있을까
가끔 복사꽃처럼 피어나는 그의
아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4월이 가고
복사꽃이 피었다
나는 올해도 복사꽃마을에 사는 선배를 만나러 갈 것이다
생각한다 찬밥 같은 안부를 들고





# 임후남 시인은 1963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시 전문지 <시현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오랜 기간 신문사, 출판사에서 일하다 지금은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가 첫 시집이다. 남자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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