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흑산도 서브마린 - 이용한

마루안 2018. 5. 1. 20:47



흑산도 서브마린 - 이용한



흑산도에 밤이 오면
남도여관 뒷골목에 노란 서브마린 불빛이 켜진다
시멘트 벽돌의 몰골을 그대로 다 드러낸,
겨우 창문을 통해 숨을 쉬는지는 알 바 없는
서브마린에 불이 켜지면
벌어진 아가미 틈새로 하얗고 비린 담배 연기가 흘러나온다
세상의 험한 욕이란 욕도 거기서 다 흘러나온다
갈 데까지 간 여자와 올 데까지 온 남자가
곧 죽을 것처럼 한데 뒤엉킨
서브마린에서는 때때로 항구의 악몽과 통곡이
외상으로 거래되고
바다의 물거품과 한숨이 아침까지 정박한다
지붕 위에선 밤새 풍랑이 일고
지붕 아래선 끈적한 울음 같은 것들이 기어간 흔적이
수심에 잠긴 뻘밭 같기만 한데,
밤 깊은 서브마린에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세상은 다 끝난 것만 같은데,
아침이면 다들 멀쩡하게 바다로 출근하는 것이다
죽을 것처럼 살아서 거짓말처럼 철썩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나면
어김없이 서브마린에 노란 불빛이 켜지고
항구의 낡은 사내란 사내 거기서 다 술 마신다
저렇게 버려진 잠수함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지만,
한번 시동 걸린 사내들은 어디든 간다
목포의 눈물에서 흑산도 아가씨까지
거기서 술을 팔든 몸을 팔든 내 알 바 없지만,
남도여관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나는
바닥의 절박한 생을 끌고 가는 한 척의 슬픈 잠수함을 본다.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사








서강에 들다 - 이용한



마음이 배를 몰아 서강에 든다
주천(酒泉) 지나 서면(西面)
애인같이 살가운 물의 속살
저 출렁거리는 악보 속에도 뼈 같은 길이 있다
그 길을 외돌아
달뜬 마음이 10월의 등을 떠민다
한때는 갈 데까지 가보자던 인생이
이제는 갈 데가 없어
세월보다 늦게 내가 왔다
와서 강변의 은사시나무도 아랫도리를 씻는
물속에 발목을 담그면,
오! 얼마나 아팠니!
느닷없이 내가 범람한다
가뭇없이 내가 일몰에 잠긴다
나를 껴안는 비릿한 물 냄새
거센 물살에 부대껴 오랜 세월 뒤척여왔지만,
한 번도 오늘처럼 비릿하지는 못했다
분밖에 저렇게 서강이 있고,
골목 끝에도 물결이 차고 넘치는데,
나는 무수한 강물을 지나치고 나서야 서강을 만나
이렇게 누추한 정거장을 돌아본다
길이 입구고 끝인,
오! 이제 몸 밖의 강자락을 친친 똬리 틀고
한 석 달 열흘을 갇혀도 좋으리라
고만고만한 산들의 강물 소리를 경처럼 들으며,
마침내 예서 나는 달뜬 삶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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