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나무 아래서의 약속 - 이기철

마루안 2018. 4. 29. 22:22



꽃나무 아래서의 약속 - 이기철



꽃나무 아래서의 약속은 쉬이 잊는 게 좋다
저 꽃잎으로 문질러도 낫지 않는 병 있으니
허공을 꽉 채운 색色들이 날아갈 곳은 어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옷 벗는 시간 속으로
꽃이파리는 진다
길을 몰라 분분한 저 꽃이파리의 알몸
져버려도 죄 되지 않는 약속
어느 가슴이 저 천 개의 약속을 다 지킬 수 있는가
온몸이 입술인 꽃잎과의 약속을,
그 아래서는 아무도 고통스럽지 않은 저 고통
저 입술을 받아두었다가 가장 어둔 날 저녁 불 켜면 좋겠다
난생 처음의 외출복을 입고
햇살 아래 부끄러이 드러낸 알몸을 보면 내 살이 아프다
지나간 백 년을 다 전하느라 입술이 부푼 꽃잎
꽃나무와의 약속은 잊힐수록 아름답다



*시집, 꽃들의 화장 시간, 서정시학








봄아, 넌 올해 몇 살이냐 - 이기철



나무 사이에 봄이 놀러 왔다
엄마가 없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다
내년에도 입히려고 처음 사 입힌 옷이 좀 큰가
새로 신은 신발이 헐거운가
봄은 오늘 처음 학교 온 1학년짜리 같다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는 얼굴이다
면발 굵은 국수 가락 같은 바람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여덟까지 세고 그 다음 숫자를 모르는 표정이다
이슬에 아랫도리를 씻고 있네
저 아찔한 맨발
나는 아무래도 얘의 아빠는 못 되고
자꾸 벗겨지는 신발을 따라다니며 신겨주는 누나는 되어야겠다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울음이 먼저 나올 것 같은
봄아, 넌 올 해 몇 살이냐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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