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분홍역에서 - 서규정

마루안 2018. 4. 29. 22:09

 

 

분홍역에서 - 서규정


아득히 멀어져 가는 기적소리를
늦은 봄비로 그쳐 세우리
우산꽃, 분홍잎새 활짝 핀 유리창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몰려 나간 안색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싸움에서조차 한쪽 편을 들어주고
얻은 전흔의 전리품인가 반쪽 잘린 차표를 쥐고
몇 번이나 밖을 내려다보다가 사라져 간다
그래 가장 낮은 목소리들이 사는 가슴 깊숙히
철렁 그물을 던져도 아무 것도 걸리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란 허탕칠 때 비로소 아름다웠다
남아 있는 것들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돌아서는
봄날의 간이역
반쪽을 줍다가 나머지를 잃어버린 우리
흔들리며 떠나던 유리창에 우산꽃은 지고
우리들은 깊이 박힐 못 하나의 모습으로
언제까지 제 얼굴을 외우며 서 있어야 한다


*시집, 황야의 정거장, 문학세계사

 

 

 

 



황야의 정거장 - 서규정


--복지국가로 가는 차표를 어디서 팔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잔털 털 보숭보숭한 여공 하나 데리고 떠나고 싶어 앵두꽃 피는 시절 기쁨과 슬픔마저도 탕감하는 저 반달 달빛이 스며드는 기숙사에서 앞장 뜯어진 노동자 천국을 읽으며 뒷장을 다 넘긴 줄도 모르고 방바닥을 집어 넘기는 손 떨리는 이 경련의 세월을 공녀야 공녀야 어디만큼 가고 있었니

천국은 멀어 천국은 멀어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제 강가에 나와 천막을 치면 우리들은 바느질 같은 발자국을 듬성듬성 비켜 남겨야 하네 아직은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강가에서 바람의 손이 닿지 않는 물속 깊이 씨앗처럼 숨어 있는 까만 눈동자를 찾기 전에 급한 물결은 어디로 가 땀방울로 수출되는 강물아

일어서는 것도 함정이었네 보이지 않는 발자국부터 시작하는 우리가 저 담벼락에 그려진 지상낙원 뼈저린 어깨로 기대어 보는 보라빛 기둥 무지개가 꽃가루처럼 부스러지며 페인트로 밝혀져 있는 공장 담벼락 희망이 무지개처럼 솟고 상식이 모래알처럼 깔린 신작로를 따라 긴 긴 머리 검은 연기처럼 날리면서 가고 있을 공녀야 그대 눈썹은 웃고 있는가 울고 있는가 여기는 벌판과 환희가 스쳐간 페인트 공화국

가자 가자 약속의 땅 은행잎 닮은 손바닥이 시간의 차디찬 엉덩이를 때리듯 담벼락에 한 폭 낙관으로 찍힐지라도 맨처음 발자국은 버려야 하네 저 고개 넘어가는 잠의 산맥은 넘어야 하네 아침햇살이 쨍그렁 기숙사 유리창을 깨뜨리기 전에 가자 가자 달빛을 타고 미끄러지며 스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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